에곤 쉴레
쉴레가 클림트가 발굴한 화가였고, 어린 시절, 안정되고 부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매독으로 인해 '세상의 위선을 바라보는' 예술가가 된 것을 안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그가 데카당스의 시기를 활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전시회에서 봤던 그림들은 데카당스의 망령을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비슷한 시기라 하더라도, '표현주의' 로서, 클림트와는 주는 인상 자체가 틀리다)그가 가졌다는 불안과, 가난과 무명에 대한 혐오가 세기말의 '광기어린 예술가' 로서, '예술의 순교자' 로서 그 스스로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게다가 당시는 아르 누보의 시대였으니, 그는 자신의 그림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흔적까지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고 했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그 날 보았던 이런 저런 그림들은 정확하지는 않으나, 이미지만큼은 강렬했다.
그런 고로, 상품화, 상품화를 얘기하는 이 시대에 예술도 물론 상품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에곤 쉴레는 비록 그 시기를 짤막하게 살고 갔지만, 이 시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 주는 한 상품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세기말은 아니지만, 세기말의 망령이 남아 있는 시기인 것도, 분명히 부정할 수는 없을 일이다. 넷상에서, '상상력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등의 수사구로 에곤 쉴레에 찬사를 보내는 많은 이들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러는 것이겠지만, 혹시 그가 보여 주던(그리고 현재와도 무관치 않을) 세기말적 감성을 세련되게 포장한 상품에 단순히 열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에 반발하면서 천재가 나타나더라도, 시대는 그 자체를 주류가 되도록 만들 수도 있으니, 어쩔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불안감을 은폐하고 싶어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뒷맛이 그리 좋지 않다.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위스망스 등(또는 그와 유사한)의 글이 일반 20대 감성적인 남녀에게 열광적으로 읽히는 세상이라면, 그건 참 우울한 시대일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