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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Metal

Abigor - Fractal Possession

[End All Life, 2007]

Abigor의 재결성은 밴드의 영광된 시절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이슈가 될 만한 사실이었지만, 사실 작년에 이 앨범이 나올 때만 해도 최소한, 내 주변에서 Abigor의 재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는 아마 "Satanized" 의 공이 클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이센스된 Abigor의 앨범이었지만, 그 앨범은 Abigor의 이름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사운드를 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름 솔리드한 정도는 된다고 할 수는 있을 앨범이지만, 그 앨범을 낸 게 Abigor라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최소한 "Supreme Immortal Art" 까지는 분명하게 느껴졌던 분위기를 그 앨범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밴드는 그 이후에도 "Shockwave 666" 7인치 ep를 발매했지만, 새로울 거 없는 두 곡만이 담겨 있는 7인치 앨범을 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Repulsor(Pulsar 2003 FX)' 는 무려, 로보틱한 이펙트가 등장하는, 기타 사운드를 전혀 들을 수 없는, 그리고 수준 미달인(부끄러울 정도로!) 곡이었다. "Satanized" 에 실렸던 원곡보다 안 좋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사실 밴드에게 관심이 떠나기 시작한 것은 정규 앨범으로는 "Supreme Immortal Art" 를 마지막으로 Silenius가 밴드를 떠난 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나마 1999년에는 Moritz Neuner가 있었지만, 그가 있을 때 나온 앨범이 "Channeling..." 과 "Satanized" 임을 생각하면 그는 밴드에 그리 어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아직도 밴드를 굳건하게 지키는 초창기부터의 멤버는 P.K. 뿐이다. T.T도 2006년에 다시 돌아왔으니 뭐, 둘 남았다고 해두자. 거기에 새로운 보컬인 A.R.이 들어왔다. 레이블도 Napalm에서 End All Life가 되었다.(물론 "Shockwave 666" 은 Dark Horizon에서 나오기는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이 이 앨범이다.

어쨌건 초창기 멤버인 P.K.와 T.T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낸 앨범은, 의외일 정도로 밴드의 초기 사운드와 거리가 멀다. 물론 후기작과는 더욱 그렇다. 즉, 밴드는 이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스타일을 이 앨범에서 구현하고 있다. 인트로격인 'Warning' 부터 그렇다.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는 물론 앰비언트, 샘플링들을 비롯한 일렉트로닉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본 리프부터 흡사 테크니컬 데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 가장 먼저 생각날 법한 밴드는 아마 Dødheimsgard가 될 것이다.(Blut Aus Nord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거기다 음질도, 이전의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이리라 짐작되는)약간은 먹먹한 음질이 아닌, 날렵한 기타 음을 깔끔하게 잡아낼 정도로 훌륭하게 변했다. 물론 드러머가 T.T.이기 때문에 밴드의 초창기 특유의 휘몰아치는 드러밍은 아직 들을 수 있지만, 음악은 초창기의 그것과는 매우 틀리다. T.T.의 드러밍에서 옛날 생각이 난다는 식으로 쓰기는 했지만, 그 T.T.도 이렇게 잦은 템포 체인지나 브레이크를 섞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 앨범은 가히 밴드의 디스코그라피 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사운드를 담고 있는 앨범이 되었다.(뭐, 단순히 왜 이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면에서는 "Shockwave 666" 이 이 앨범을 '훨씬' 능가하기는 한다만)

그리고 그 결과는, 과장 좀 섞어서 놀라울 정도다. Dødheimsgard를 말하긴 했지만 이 앨범은 어느 밴드와도 사실 바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이다(라고 생각한다). 듣기 편한 곡은 단 한 곡도 없지만 어느 트랙도 만만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 Silenius를 넘어설 수 있는 Abigor의 보컬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아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A.R.도 만만한 보컬리스트는 아니다. 'Cold Void Choir' 같은 곡에서 들을 수 있는 클린 보컬은, Dødheimsgard가 자주 써먹는 방식이라 익숙한 감은 있지만, Garm의 전성기에 들을 수 있던 그것과 유사하다. 'The Fire Syndrome' 에서 들을 수 있는 스크리밍은 A.R.이 블랙메틀 보컬리스트로서 충분히 자질이 있음을 보여준다. 굴곡 심한 곡 스타일에 맞게 그의 보컬도 매우 다채롭게 변화해 가는데, 그런 면에서 근래의 평들을 보면 A.R.을 Atilla Csihar와 비교하는 의견도 많은 것 같다. 그가 Silenius보다 못할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는 Thurisaz나, Stefan보다는 확실히 밴드에 잘 어울리는 보컬리스트이다.(나는 아직도 Stefan이 어떻게 Abigor에 가입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은, 이 앨범이 밴드의 어느 이전의 앨범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스타일이기는 하나, 사실 "Channeling..." 이후의 앨범들 중 이 앨범만큼이나 밴드의 가장 뛰어나던 시절의 면모를 많이 갖고 있는 앨범은 없다는 것이다. 'The Fire Syndrome' 은 그 일렉트로닉스와 변화무쌍한 리듬 파트에도 불구하고, 리프에 있어서 "Supreme Immortal Art" 시절의 그것과 비슷하게 들리는 면이 있다. 'Injection Satan' 같은 곡도 그렇다. 밴드 특유의 하이 피치의 강렬한 기타 연주를 다시 들을 수 있다. 다만 탁월한 몇몇 곡이 있을 뿐, 나머지 곡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밴드의 팬으로서 이런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복귀라면 분명히, 기대 이상이다. A.B.M.S.를 대표했던 밴드이면서, "Abigor play true Austrian Black Metal exclusively." 이 말에 어울릴 법한 밴드의 모습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저 한 마디 때문에, 다른 훌륭한 밴드도 매우 많지만, 가장 카리스마적인 밴드는 Abigor라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으니까. 호오는 상당히 갈릴 만한 스타일임은 분명하긴 하다만. 글쎄, Silenius가 돌아온다면 다시 예전 스타일이 될 수 있으려나. P.K.가 있는 이상 그건 힘들겠지만,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