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urious Trauma/Personnel

개인적 일상사 - 던힐 레코드, Smith

태어나서 한 번도 서울 밖에 주거지를 두어 본 적이 없는데다(물론 군 복무 기간은 제외) 다른 구로 이사를 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니만큼 서울 시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촌에서 조금 걸어가면 나오는 대형 마트 부근을 제외한다면 그리 서울답지는 않은 풍경일 것이다. 산을 깎아서 만든 동네여서 그런지, 안개가 짙게 끼는 경우도 많은 편인데, 해가 진 이후에는 약간은 호젓하게 보이기는 한다(물론 시골의 호젓함과는 그 격이 틀린 수준이긴 하다만) 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배우는, 도심지 외의 부심지(뭐, 버제스의 중심지 이론이나 배후지 등의 개념들을 배운 기억 정도는 있다) 중 가장 가까운 곳도 대충 버스를 타고 (운이 조금 좋지 않다면)30분 이상이 걸릴 수도 있으니, 구석도 보통 구석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동네도 지하철이 다니고, (운이 좋다면)종로까지 30분 가량에 갈 수도 있는데다, 한반도의 가운데 쯤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박혀 있는 게 서울인지라, 일반적인 교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반쯤 농담삼아, 이 나라의 음반 시장은 거의 아프리카 수준이라고도 얘기하던 형이 하루 종일 앉아서 음반을 틀어대던 중고 음반점은 사실 이 동네에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여고 정문 근처의 어느 정도는 허름한 건물에서 세월의 피로함이 느껴지는 주름살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가 너무 짰던 떡볶이를 팔던 분식집 오른 쪽에 있던 음반점은 여고생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특히 남성)아이돌 댄스 가수들의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고, 음반점 형도 항상 그런 앨범들을 도매상에서 '따 오는 데' 주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앨범을 사는 여고생들은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브로마이드를 얻으러 오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그리고 일단, 그 형이 음반점에서 P2P 프로그램으로 각종 희귀 음원들을 다운로드하면서 틀고 있는 음악들은 멜로트론 자욱한 프로그레시브 록이거나, 팝적이어봐야 Roxy Music이나 Phil Lynott의 솔로 앨범 수준이었으니 그 음악을 듣고 오는 학생들은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중고음반점인 만큼 동네의 (물론 그리 많지는 않은)음악 좀 찾아 듣는다는 어린 친구들이 음반 판매를 위탁하러 왔다가 알게 되거나, 또는 그 형이 그렇게 알음알음 알게 되어 열심히 '음악 교육' 을 시킨 친구들 정도가 너댓 명 정도는 있기는 했다. 물론 그럼에도 시대가 변한 탓인지, 그 형이 가장 좋아하던 프로그레시브 록을 좋아하게 된 친구는 없었는데, 덕분에 '걔네는 왜 그래?' 식의 푸념을 받아 내는 건 보통 내가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 형의 기준에 맞게 음악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건 나는 변박자를 꽤 즐기는 편이었고, 20분 가량의 대곡도 나름 잘 견뎌 내는 편이었다.

형은 그런 어린 친구들 얘기를 하거나, 자신이 음악을 듣고 앨범을 사기 위해 발품을 팔면서 만난 이런저런 사람들의 얘기를 하곤 했다. 누구는 집에 소장량이 엄청나다던가, 누구는 가진 척만 한다던가, 누구는 요새는 패션에만 관심이 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인데, 컬렉터 기질 덕분에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흔히 술 안주가 되는 '열심히 씹히는' 경우는 두 번째가 많았다. 특히 자주 얘기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실제로 음악을 많이 들었고 많이 가지고 있지만, 프라이드가 지나친 탓에 남이 어떤 밴드를, 레이블을 얘기하더라도 모른다고 말을 하질 않는 사람이더란다. '어느 정도냐하면은....' 으로 시작해서 항상 나오는 에피소드는 이런 것이었다. 그 형을 포함해서 세 명이 그 분과 술자리 중, 그 분이 화장실을 가신 사이에 서로 짜고 '영국의 컬트적인 성향의 포크 뮤직을 주로 내던 소규모 레이블 던힐 레코드' 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다. 물론 레이블은 허구다. 마침 그 형을 포함한 세 명 모두 던힐 담배를 피고 있던 탓에 즉흥적으로 지어진 것도 있고, '켈트 족의 향내가 묻어나는' 또는 '아일랜드의 초원의 목동이 다니는 언덕' 정도의 문구에 'Dunhill' 은 꽤 어울리지 않냐, 하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그 분은 던힐 레코드에 대한 세 명의 질문에 호기롭게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더란다. 덕분에 '던힐 레코드' 는 그 형과 나 사이에 그런 사람들을 조롱하는 문구가 되었다. 세상에 던힐 레코드라니, 그걸 믿는단 말인가.


그게 5년은 넘은 것 같다. 음반점은 애들이 도통 음반을 안 산다는 형의 한숨이 늘어가면서 소리 없이 문을 닫았고, 그 형은 음악이고 뭐고 어디 조그만 데 빌려서 옷장사라도 해야겠다고 하며 동네를 떠났다. 동네에서 음반을 사거나, 돈이 없더라도 간혹 하릴없이 가서 시간을 죽이던 나도 이젠 비닐 벗기는 맛을 느끼면서 중고음반을 사기 위해서는 홍대까지 나가야만 하게 되어으니 보통 아쉬운 일이 아닌 셈이다. 물론 홍대의 중고음반점을 가서 앨범을 살펴 보면서 그 때의 생각을 할 때가 왕왕 있다. 그래서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생각했던 던힐 레코드가 실제로 있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거 그 때 그 네 명 중에서 진실을 알고 있던 것은 대체 누구였던 말인가 싶어서 우습기도 하고, 어쨌건 간만에 이마가 넓은 탓에 항상 그 날의 앞머리 헤어스타일을 고민하던 그 형을 생각나게 해서 앨범을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다. Smith라는 이름에서 나는 Morrissey를 먼저 생각했지만 음악은 소울풀한 여성 보컬이 돋보이는 블루스 록이었으니 내 예상은 단단히 틀린 셈인데, 어쨌건 음악은 (일단 처음 듣기에는)훌륭했고, 가끔은 이런 식으로 예전 생각을 해 보는 게 그리 나쁜 건 아닐 것 같다. 그 형은 항상 맛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캡틴 큐(맞다, 그 저가형 '위스키')를 애용했는데, 눈 딱 감고 내일은 한번 먹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