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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Writings

Seoulsoundmap, 유포니아

꽤 오래 전부터 이어진 프로젝트인 듯하나, (당장 Murray Shaefer가 "Soundscape, the Tuning of the World" 를 쓰기 시작한 건 1977년부터이니, 사실 이런 문제는 꽤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셈이다.)가시화되고 있는 것은 최근인 듯하다. 서울시가 이에 관여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디자인 같은 건 되게 신경쓰시는 시장님이니 - 참고로, 되게 나쁜 의미로 하는 말임 - 충분히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Sound@Media는 일반의 참여를 바탕으로 금년 말까지 서울의 소리지도를 구성하는 SeoulSoundMap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소리지도라고 해서 서울 전역을 소리로 뒤덮으려는 기획은 아닌 듯하나(랜드마크에 상응하는 '사운드마크' 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본다면), 어쨌거나 이것은 '환경음' 에 대한 기획일 것이다. 아니라면 내 생각에는 더욱 심각할 것인데, 이는 사운드스케이프 개념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운드' 외에 '사운드스케이프' 를 강조하는가, 즉, 환경음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것이 캠페인의 진의가 아니려나 생각된다.



이 사진 만큼이나 도시를 싸고 있는 사운드스케이프는 모노톤의, 로우-파이한 것일 수 있으니, 기획은 충분히 납득은 된다


굳이 사운드스케이프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문제제기는 당대에 와서 더욱 많아지고 있다고 보인다. 현재까지 시각에 의해 규정되어 온 문화의 듣기 문화로의 이행에 대해, Joachim Ernst Berendt는 이로서 문화적 위기는 물론, 지구의 생태학적 위험에까지 이르는 문제의 해결을 예상하고 있다.[각주:1] 사실, 어쩌면 이는 먼저 Nietzsche가 예기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독일인들은 '제 3의 귀' 를 결여하고 있다는 그의 불평은 당대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얘기이겠지만(굳이 '독일' 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시간은 이젠 제 3의 귀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꼭 독일의 문제만은 아니도록 만들었다는 느낌이 있다. Marshall McLuhan이 이미 듣기 문화로의 이행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바도 있었음을 생각해 보자.[각주:2]

다만 먼저 전통적인 문화(굳이 말하자면 이는 서구의 문화가 될 것이다)가 시각 우위의 그것이었는가. (공부하기 싫어하는)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다만, 시각적 진리가 무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식이 존재했음은 기록에서 말해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쓴 것은 아폴로에게 바치는 서문이었고, 니체는 그 존재 자체가 그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시각의 지배가 관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을 시각의 기본적 특징에 대한 찬사로 시작하고 있기도 하다. Shaefer는 과학자들이 청각적 현상을 자꾸 시각적 현상 방식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불평하기도 하지 않는가. 계몽주의가 빛과 시각을 중요시했다면, 이 부분에서도 계몽주의의 유산이 분명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듣기 문화로의 이행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유보한다. (시각 우위의 비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이미 수많은 이들이 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청각이 시각과 같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요구는 시각의 지배가 있는 문화에 있어 분명한 도전이 될 것인데, 그 도전의 결과가 청각적 야만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음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음악이어도 다른 이에게는 시끄러운 음악Muzak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3]. 문제는 듣기는 시각과는 달리, '거리를 두지 않고 침투한다는' 것이다. 보기 싫은 풍경은 눈을 감아서 보지 않을 수 있지만, 손으로 귀를 막아도 소리는 흘러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청각은 분명 시각보다 오염에 취약하다. 일상의 생각지 못한 풍경이 오염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 본의 아니게 동네 주변 대형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는 동안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적어도 내게는 청각적 환경오염에 다름 아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불명확하지만, 마트에서 Spacemen 3을 틀어 놓는 사람들은 과연 무슨 경우인가.

그래서, 아무래도 그런 기획의 경우 어떠한 소리의 이상향을 설정하는 것보다는, 소음을 피하고, 불가피하다면 이는 일상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어야 된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감안할 것은, 공공의 영역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아방가르드가 긍정적으로 소음을 이용할 수는 있겠지만(이를테면 존 케이지), 아방가르드의 기준이 일상의 표준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상의 표준이 될 수 있는 아방가르드는 이미 그 시점에서 아방가르드의 급진성을 상실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캠페인은, 흔히 예술적 작업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Sound@Media는 스스로의 소개에서 소리는 예술인 동시에 미디어라는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업의 문제이다. 베를리오즈의 유포니아Euphonia가 실현될 수 없었던 기획인 것은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 Joachin Ernst Berendt, Nada Brahma, Die Welt ist Klang, Frankfurt a.M. 1983. [본문으로]
  2. Marshall McLuhan and Bruce R. Powers, The Global Village. Transformations in World Life and Media in the 21ST Century, New York 1989, S. 15. [본문으로]
  3. Max Neuhaus, "Klanggestaltung von Signalen und Sirenen", Akustik im Dienst der Sicherheit. In: Langenmaier, 62-7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