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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Writings

대중 음악의 예술성의 가능성

근래 돈 받고 - 아직 받진 못했으니 쏘라는 말 금지 - 글을 쓰는 게 있는데, (물론 음악에 대한 글이다. 뭐, 사실 결과물을 보면 이거 돈을 받아도 되긴 되나 싶기는 함)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풀어 나가려다 보니 시대상을 조금이나마 짚어 나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거기다가 대중 음악일지니, 뮤직 비즈니스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마이너 레이블일지언정, - 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있지만 - 비즈니스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생각보다 뮤직 비즈니스의 범위는 넓다고 생각한다. 요새 같은 세상에, 레이블은 그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명시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아마도 주된 화두는 대중 음악이 일종의 상품인지, 상품이라면 그게 예술인지에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케케묵은 질문이고, 사실 그 대답은 이 물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좀 더 답하기 쉬워 보인다. 대중 음악을 한다면, 어쨌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이를 대중에게 공개할 것이다. 그것은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기는 사실 창작자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대중의 반응이 판매고에 반영되어 그로써 밥줄을 삼는다면 - 다른 밥줄이 또 있을 수도 있겠지만 - 그렇게 팔려나가는 음악은 상품일 것이다. 물론 창작자의 노동이 투입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시장 원리에 전혀 따르지 않고, 경제적 의도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음악성' 에 따라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는 좀 얘기가 틀리겠지만(정신의 창조력이 소외를 압도하는 드문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경우를 자본주의 하에서의 대중 음악의 얘기로 일반화하는 것은 지나칠 것이다.[각주:1] 소외된 노동을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소외되지 않았으나 즐길 수 없는 노동도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이는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소외되지 않은 노동은, 그 노동이 생산자의 통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예술이라고 할 것인가? 물론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 특히 근래에는 정의 자체를 거부하는 견해들도 많아 보인다. 끊임없는 예술의 혁신 정도가 그 근거가 될 것이다 - , 위에서 노동의 맥락에서 이를 상품이라고 했으니 그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정확하지는 않을지언정)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투입하여 생산한 것이 시장에서의 관계에 놓임으로써 상품이 된다면(무료로 '파는' 것은 그래서 구분된다) 대중 음악 작품을 만드는 '노동' 도 그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상품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작가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 글을 쓸 수는 없고, 시인은 시가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될 때 몰락하게 된다.'[각주:2] 그렇다면 역시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간단한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예술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각주:3]

(사실 여기에는 '순수 창작자' 와 '해석자' 모두를 예술가로 볼 것인지 문제가 존재한다. 사실 전자에 대해서는 크게 논의가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어디까지를 경계로 볼 것인가?)


다니엘 바렌보임은 '해석자' 이겠지만 누구도 예술가라는 데 토를 달지 않을 것이다


GMF에 한효주도 나와서 노래하던데, '해석자' 이겠지만, 가수로서의 한효주도 예술가라 할 것인가?
(다른 얘긴데, 역시 GMF는 내가 갈 만한 곳은 아닌 것 같다. 이젠 인기가 많아져서 사람도 너무 많다)

물론 오늘날 순수하게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산물의 형태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적어도 거의 모든 경우에는 예술이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소외된 노동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 혼재된 상태로 나타날 것이다. 앨범을 녹음하더라도 - 프로듀서는 그렇다고 치고 - 여러 명의 스태프들이나 스튜디오 직원들의 노동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고, 라이브 투어를 위해서는 뮤지션이 대동하는 크루들은 물론이고, 운송을 담당하는 운전사 등 많은 노동이 들어갈 것이다.[각주:4] 그렇지만 그 결과물을 '예술' 로서 만들 수 있는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닌 소외되지 않은 노동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중 음악이 예술이 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사실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존재하는데,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산물이 무조건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술은 다른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산물과는 다른 맥락이 작용한다. 아마도 한슬리크 식의 형식주의 - 물론 이 용어를 '형식만 갖추면 된다'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한슬리크는 바보가 아니었다 - 등의 논쟁이 튀어나온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맥락이 작용한다는 것에는 이견들이 없어 보인다. 예술적 자유가 통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소외된 노동과 소외되지 않은 노동은 이 시대에서 대립할 것이다. 많이 팔린다는 것이 '좋다' 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 '또 다른 맥락' 에서 작용하는, 그 부분을 지적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1. 이런 경우는 시장에서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럼 상품으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본문으로]
  2. Karl Marx, 'Debating the Freedom of the Press', L. Baxandall and S. Morowski (eds), Marx and Engels On Literature and Art (New York, 1974) 에서 약간 변형해서 인용. [본문으로]
  3. A. Sanchez Vaquez, Art and Society : Essays in Marxist Aesthetics(London, 1979) 참고. (뭐 나도 다 읽지는 않았음) [본문으로]
  4. Pink Floyd는 "The Wall" 투어 당시 실제로 벽을 쌓고 무너뜨리는 퍼포먼스를 했다고 한다(물론 내가 보고 확인한 것은 아님). 그렇다면 공연 뒤 그걸 청소할 사람도 있어야 마음놓고 퍼포먼스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청소부를 예술가라고 하지는 않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