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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Metal

Ordo Templi Orientis - The Distance of Cold

[Kasla, 2010]

포장을 뜯으니 저 커버가 나왔을 때의 당혹감을 아직 잊을 수가 없다(밴드 이름이나, 주문한 곳이나 이런 커버의 앨범이 날아올 경우가 아니었다). 이 정도 커버면 어쿠스틱한 피메일 포키의 앨범이 아닌지를 의심해 볼 수준인데, 어쨌든 이 앨범도 블랙메틀이라는 점을 일단 말해 둬야겠다. 그럼 사실 어떤 스타일일지는 짐작하기 쉬운 일이다. 일찌기 이런 식의 당혹감을 준 블랙메틀 밴드들이 몇 존재했었는데, 그런 밴드들 중에서 아마도 요새 가장 인기 있는 이들은 Alcest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커버를 살펴보니 좀 더 밝은 색조이긴 하지만 분위기도 Alcest의 그것과 비슷한 편이다. 그러니까 '76 minutes of experimental stuffs' 라는 광고 문구에 일단 잠깐 짜증을 내고 가도록 하자. Alcest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이런 문구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일단 밴드 이름과도 어울리지가 않는 일이다! Ordo Templi Orientis는 Aleister Crowley가 이끌던 바로 그 단체였다(말하고 보니, Crowley가 사실 블랙메틀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소재이기는 하다만).

이 벨로루시 출신의 2인조 밴드는 그런데 예전부터 이런 스타일을 가져왔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앨범은 벌써 세 번째 풀-렝쓰 앨범인데(2008년에 첫 앨범이 나왔고, 사이사이에 계속해서 스플릿을 내고 있음을 보면 엄청나게 정력적인 활동이다) youtube에 올라와 있는 이전 곡들을 보면 'depressive' 한 스타일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 Alcest 스타일이 이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밴드는 나름 드라마틱한 변화를 꾀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앨범이 사실상 밴드의 컴필레이션에 가깝다는 것이다. 두 곡만이 신곡이고('My Garmonbozia' 와 'Sunrays Scars' 이다.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그 외의 곡은 기존 발표곡들이다. 물론 그 곡들도 다시 Alcest식으로 변주되어 있다. 다만 Alcest보다는 좀 더 무거운 톤의 연주이기는 하다. 여성 보컬이 덧입혀지기는 하나, 보컬도 Alcest보다는 일반적인 suicide-black 밴드들의 그것에 가까운데, 이를테면 'Room 418(214 version)' 이 그런 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재즈풍의 베이스라인은 지금 무슨 앨범을 듣고 있는지를 일깨우곤 한다.

다만 위에서 볼멘소리를 한 광고 문구가 나름의 신빙성을 갖는 부분(뭐 그렇다고 해도 실험적이지는 않지만)은 앨범의 중반 이후이다. 'Permanent Suicide' 까지의 다섯 곡이 일반적인 'blackgaze' 스타일에 가까운 편이었다면 뒤의 세 곡은 1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가져가면서 상대적으로 블랙메틀의 전형에 가까운 연주이지만 그 분위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약간은 괴이한 편이다. 싱글커트라도 생각하는 것인지 긴 버전과 짧은 버전이 각각 실려 있는 'Funny Smiles and Purple Pills'(사실 곡명만으로는 Solefald가 생각난다) 는 트윈픽스의 한 부분의 샘플링으로 시작해서 전형적인 트레몰로와 다운템포 파트를 병치시키는 구성을 보여주는데(보컬도 앨범의 앞부분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사실상 두 곡 뿐인 앨범의 후반부이기는 하지만 그 스타일을 대변하는 것은 이 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앨범은 조금은 애매한 편이다. Alcest를 기대한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전적이 드러나는 의외의 니힐리스틱함에 당혹스러울 것이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의 당혹스러움도 당연할 것이다. 사실 이 앨범에 호오를 밝히는 것도 조금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커버의 당혹스러움이 그래도 음악에서는 덜 했던 까닭이다), 그래도 depressive 스타일로 시작했던 블랙메틀 밴드가 어떻게 이런 스타일로 변모해 가는지를 엿볼 만한 앨범으로서는 나름의 재미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Neige가 영향력은 없었지만 Peste Noire의 멤버이기도 했음을 떠올리면, 이런 식으로의 음악의 변화가 청자의 입장과는 별개로 나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는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정도로만 해 둔다.


커버는 저래도 만드는 이는 이렇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