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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ious Trauma/Personnel

소비에의 강박



유럽에 2주 정도 갔다 올 기회가 있었다. 피렌체에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초행길이었고 별다른 준비가 없었던지라 오랜 세월을 버텨 온 그래도 꽤 복잡해 보이는 피렌체의 골목을 혼자 돌아다닐 엄두는 나지 않았던지라 일행을 따라다니다 보니 가게 된 곳이 피렌체의 가죽 시장이었다. 대략 8명 정도였던 우리 일행은 그 때부터 나를 제외하고는 여기저기 매장을 활보하면서 피렌체의 가죽 제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네치아가 유리 세공으로 유명한 곳이라면, 피렌체는 가죽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거의 두 시간 반 가량의 쇼핑 이후, 역시 나를 제외한 일행들의 손에는 이런 저런 가방들로 가득했다. 친구, 아내, 또는 자기 것 등으로 여섯 개의 가방을 들고 웃음짓는 얼굴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일행들, 또는 그들이 가방을 사다 주려고 한 이들이 그 만큼이나 가방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날은 아침부터 피렌체 근교의 프라다 스페이스를 찾아간 일행들도 있었는데, 나와 함께 있었던 일행들은 프라다 스페이스 대신 가죽 시장을 선택했을 뿐, 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그 가죽 시장의 가방들도 프라다 핸드백 등이 그러한 것처럼, '사치품' 이라 분류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효용이라는 면만 따져 놓고 보면 굳이 그 가죽 가방들을 사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니까. 역시나, 그 날 숙소로 돌아와서 가방들을 다시금 살펴보면서, 이 가방은 법전도 안 들어가니 법정에 가져 갈 수는 없겠구나 식의 푸념을 늘어놓는 이도 있었다. 이미 그 가방의 외관 자체가 법전 등을 가지고 다니려고 살 만한 것은 분명 아닌 것으로 보이긴 했지만.


그런데 사치품이라고 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치품을 구입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물론 아니다. 고전경제학은 소비자가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선택을 한다지만, 합리적인 이성의 결과가 아닌, 차라리 무의식적이면서도 감성적일 플로 차트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근래의 경영학 이론이 제시하기도 한다. 주변에서 내게 스마트폰 구입을 권유하는 지인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이폰 구입을 권유하는 이들은 거의 하나같이 애플 제품의 '특별함', 또는 아이폰이 가진 감성적인 면, 등을 얘기했다. 물론 스마트폰이야 요새는 거의 사회적 현상처럼 되어 버린 터라, 위의 가방과 같이 보기도 어렵겠지만(그리고 스마트폰을 -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 두 개 이상 사용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떠한 물건을 구입함에 있어서 순전히 그 물건의 객관적 성능만을 고려하지는 않는 경우가 있음은 아무래도 명확해 보인다. 사치품의 구입을 구런 주관적인 부분의 발로, 라고 해도 많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소비자가 그런 부분을 통해서 효용을 찾는다면야 문제될 게 있겠는가.

아무 것도 사지 않던 내게 일행 중 한 명이 가방 구입을 권하면서 했던 말은 "너만 아무 것도 안 사면 괜히 위축되지 않겠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문제되는 것은 사치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치품을 사도록 만드는 분위기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구입한 가방들, 물론 거리를 걸으면 수많은 명품 브랜드의 가방들을 볼 수 있으니 그렇게 가방을 구입한 이들이 그걸 집에 쟁여만 놓고 다니는 건 분명 아니겠지만, '잇 백' 이니 뭐니 하면서 고가의 가방을 하나 둘 정도 구비하는 것이 패션지 등은 물론 미디어, 때로는 그런 부분을 비판하는 이들에 의해서까지 당연한 현상으로 얘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게 전부 허영이라고 얘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문제는 그게 허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분위기가 사람들을 짓누른다는 것이다. 그런 명품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꿀리지 않는다, 는 식의 소비에의 강박이랄까. 그 날 내가 시장에서 한 일은 쇼핑하던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밖에 없었지만, 꽤나 피로했던 것은 그런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post script :
그리고 굳이 가방 예를 들면서 말했지만 가방만이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가방을 통해 사치를 향유하는 쪽이 주로 여성이라면, 남성들은 시계 등을 통해 이를 향유할 것이다. 정 안 되면 동대문 등에서 판매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짝퉁' 을 통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