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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 Literature of Obscure Minds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웅진지식하우스, 2007]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저, 김라합 역

제목이나 저자의 변이 그렇듯이, 이 책은 아마도 '팬 픽션', 즉, 팬픽이라는 라벨을 달고 나온 글 중 가장 고급의 부류에 속할 것이면서, 보르헤스라는 대작가에 부쳐진 글일 것이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것은 제목에서 보르헤스를 제외한 '오랑우탄' 의 부분이다. 이 소설의 내용에서도 드러나는 것이지만, 정작 보르헤스의 팬픽임에도 이 글을 읽기 위해서는 보르헤스를 알 필요는 없다. 사실, 보르헤스의 모습이야 당장 보르헤스가 화자로 등장하는 이 책 속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에드거 앨런 포를 접하지 않은 이라면 오랑우탄 자체가 좀 낯설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 , '황금 곤충' 을 읽어보지 않은 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여유가 있다면 러브크래프트를 읽어 보는 것도 좋다). 뭐, 어쨌든, 이 책은 한 발은 보르헤스에, 한 발은 에드거 앨런 포에 걸치고 있는 재기 넘치는 추리소설이다.

'추리'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이 책의 추리는 결론적으로는 뻔한 편이다(물론 그 결론이 '정말' 결론인지가 문제이긴 하다. 이 책에서는 말이다.). 다만 화자인 보르헤스가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은 독특한 면은 있다. 특유의 지적 유희가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에드거 앨런 포는 물론이거니와 러브크래프트, 발터 벤야민, 루이스 캐럴, 심지어는 고대 카발라까지도 이어지는 다양한 텍스트를 준거로 폭넓게 이어지는 이야기가 갑자기 결말에서 범인과 이어지는 독특함이 그 추리의 '뻔함' 을 덮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 추리소설은 장르의 일반과는 달리 범인을 굳이 찾기 어렵게 감추려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아마도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이름으로 썼던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 을 참고한 것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편지 한 번에 모든 걸 밝혀 줘야 했던 이시드로 파로디에 비해서는 여러 번 편지를 주고 받는 이 책에서 범인을 짐작하는 일이 더욱 쉽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의 인물들이 정작, 이 책의 발단이 되는 살인 사건의 진범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네크로노미콘이나 요그-소토스, '불멸의 오랑우탄' 등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등장할 수도 있는 거겠지만... 포겔슈타인은 자신이 본 것을 작중에서 소설로 쓴다. 물론 포겔슈타인은 순전히 솔직하기만 한 목격자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그도 소설을 쓰는 작가인지라, 이 지점에서 이 소설은 실재와 보고 쓰는 것 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 버리는, 대단히 부조리한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하긴 추리소설이면서 네크로노미콘이 튀어나오는 재기발랄함 자체가 부조리일 지도 모르겠다. 추리소설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분석적인 전제에서 시작하는 장르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추리소설로 보는 것보다는 부조리한 텍스트 자체로 보면서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이 좀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보르헤스가 어쨌든 본격 추리소설 작가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약간의 볼멘소리를 한다면, 말이 안 통하는 건 아니지만 꽤나 뻑뻑한 번역(이 책 번역의 문제점은 문장 자체가 뻑뻑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주어가 너무 많거나, 쓸데없이 길어지기도 한다.)이 그렇고, 굳이 팬픽이라니까 전기적 사실을 끄집어내는 것이지만, 보르헤스는 러브크래프트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 적도 없고, 서재를 그렇게 난장판으로 관리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뭐, 사실 보르헤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 이런 책을 읽는다면 그 자체로 넌센스이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팬픽이라니까 하는 얘기다. 그리고 팬픽은 팬픽답게, 보르헤스 특유의 지적 유희를 보르헤스보다는 좀 덜 고상하게 재현하고 있으니 덜 부담스럽게,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2012년 12월 20일 기준으로, 어제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는데(무슨 날이었는지는 알아서 생각해 보시길), 그래도 유쾌함을 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