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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Metal

Abigor - Time Is The Sulphur In The Veins Of The Saint

[End All Life, 2010]

"Fractal Possession" 은 좋은 앨범이었다. 이전 작인 "Satanized"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만 그래도 불안했던 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개인적으로 그랬다는 얘기다), Dodheimsgard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복잡해진 사운드가 과연 다음 앨범에서는 이들이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Abigor는 한 번 연주한 곡은 다시는 연주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힐 만큼 사운드를 계속 변화시켜 왔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진폭 큰 변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Supreme Immortal Art" 에서 "Channeling the Quintessence of Satan" 으로의 변화도 컸지만, 난 이건 솔직히 퇴보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편이다)Dodheimsgard까지 간 마당에 다음에는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시도할 것인가? 적어도 "Shockwave 666" 에서의 그 납득할 수 없는 사운드는 밴드가 전자음악 쪽에는 별로 재능이 없어 보인다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앨범은 일단 그런 걱정은 비껴간다. 테크노 사운드까지 자주는 아니지만 나오는 마당에(이 대목에 불만인 사람도 있겠지만, 레이블이 이러한 컨셉을 주문한 밴드가 Abigor와, Blacklodge라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 앨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그런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명확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앨범의 리듬 파트는 밴드의 어느 앨범보다도 격렬하게 진행된다. 거의 Dillinger Escape Plan이나 Mr. Bungle 같은 이들을 생각나게 할 정도인데, 끊임 없이 변화하긴 하지만 기타 리프는 블랙메틀의 그것이다. 비중은 작지만 신서사이저 또한 특이하다. 사실 이런 식의 용례는 70년대의 호러 컨셉트의 밴드들이 주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해먼드 오르간까지도 등장한다. 이 쯤 되면, 이런 식의 (어찌 보면 상반되기까지 할)질료들을 섞어내는 것이 앨범의 관건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작에서도 동일하게 제기되던 문제였다.

밴드는 전작과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전작은 Dodheimsgard(이들이 데스메틀이라는 건 아니지만)과 비견될 만큼이나 데스메틀의 방법론을 받아들인 작품이었다. 이번에는, 하이 피치의 트레몰로 기타가 명확하게 곡을 이끌어 나간다. 물론 괴이한 코드의 아르페지오 등도 나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전작 식의 'twist' 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변화가 심하기는 하지만, 앨범이 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분위기' 이다. 두터운 텍스처의 기타 리프들이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전작에서 기타가 맡은 역할을 하는 것은 상술한 대로 매우 'furious' 한 베이스이다. 정교하게 짜여진 리듬 파트에 얹혀진 기타 리프가 만들어내는 'chaotic' 한 분위기는 덕분에, 그럼에도 통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위에서는 신서사이저가 중요하다고는 했지만, 사실 덕분에 앨범에서 신서사이저를 명확하게 확인할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밴드는 이렇게 위에서 제기한 문제를 비껴간다. 여러 요소가 대등하게 조화롭지는 않지만, 기타에게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래서, 사실 이 앨범을 듣고 제일 먼저 생각난 밴드는 근래의 Deathspell Omega였다만, 그래도 그들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이번에는 Abigor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밴드가 이렇게 긴 곡을 쓴 것은 처음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epic' 한 패시지를 중간 중간 확인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앨범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중간 중간 삽입된 앰비언트 사운드가 그러고 보면, 그 용례가 드라마틱함을 의도한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어쨌건 나는 그런 부분을 밴드의 의도였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중요한 것은 밴드는 (전작의 연장선이라고 생각은 하지만)다시 변화했고, 과장 좀 섞어서, 앨범은 하이브리드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소리까지 간혹 나오는 마당에서, 블랙메틀의 미래의 한 방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원래 뛰어난 이들이긴 했지만, 이 앨범을 들은 시점에서 말한다면, 이들은, 천재다.

post script :
1. 두 곡에 38분. 분명히 감당하기 어려운 앨범이긴 하지만, 반드시 가사를 읽어 보면서 듣기를 권한다.
2. Blacklodge의 "T/ME" 과 동일 컨셉트의 앨범으로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