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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Metal

Bitchslicer - III : Lycanthropic Fellatio

[World Eater, 2007]

뭔가 위트가 넘치는 커버만 보아도 앨범은 충분히 눈길을 끌고, 이 앨범을 스래쉬/그라인드 류의 음악이라고 한다면, 이 앨범은 최근 몇 년 동안 들은 그와 같은 류의 음악들 중 가장 인상적인 앨범들 중 하나이다. 일단, 매우 익숙한 클리셰들의 반복이 '대부분의' 밴드들의 특징이라고 한다면(하긴 다른 장르라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다) Bitchslicer는 확실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밴드이다. 위에서 '대부분' 이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어쨌든 자신들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근래의 '그라인드' 류의 밴드를 거의 알지 못한다. 끽해야 Total Fucking Destruction 정도가 있을 텐데, 이들의 경우는 멤버들이 꼭 '근래' 의 인물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만큼 넘어가도록 하자. 그렇게 치면 이들은 생각보다 아주 보기 드문 경우인 셈이다. World Eater 레코드는 사실 꽤 양질의 앨범들을 내놓는다고 생각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마이너 레이블의 특성상, 판매고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앨범을 좀 마구잡이로 발매하는 인상도 주는 듯한 곳인지라(물론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이 정도의 물건을 내놓는다는 것은 레이블 입장에서도 드문 일이다.

그 정체성은, 앞에서 적은 바도 있지만, 이들을 단순 그라인드라기보다는 '스래쉬/그라인드' 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라는 데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라인드코어의 '익숙한 클리셰들의 반복' 은, 어찌 보면 단순히 그라인드코어 뮤지션들의 독창성의 결여에 문제를 둘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장르의 본질적 특성에 대해 논하는 것은 상당히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거칠게 이야기해서 그라인드코어(대부분)의 호흡이 길지 않은 리프의 전개와 (다른 장르에 비교하면)지나치게 짧게 느껴지는 호흡의 비트는 어지간한 솜씨가 아니고서야 그 안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라인드코어가 요구하는 사운드 자체의 응집성이 뮤지션에게 달리 빈틈을 많이 남겨 두지 않는 셈인 것이다. 이들의 음악에서 가장 귀에 들어오는 것이 스래쉬메틀 풍의 솔로잉이라는 것은 그 증거의 하나일 것이다. 말하자면 밴드는 스래쉬메틀과의 교잡을 오리지널리티를 위한 길로서 선택한 셈이다.

그런데, 사실 그라인드코어와 스래쉬메틀 자체가 무관한 장르가 아닌 데다, 그 '스래쉬메틀' 의 면을 유별나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방법론은 그리 좋은 길이 아닐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밴드는 지나간 시절의 스래쉬 마스터들과 같은 리프메이커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밴드가 그라인드코어와 스래쉬메틀을 섞어내는 모양새가 중요하다. 밴드는 여기에서 다시 생각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밴드를 주도하는 King Gary의 유머러스함은 말할 필요가 없고, 그 유머 감각(성적 유머라는 게 조금 문제이긴 하지만 - 앨범 제목 참고)으로 양자를 엮어내는 모양새는 거의 '프로그레시브할' 정도이다. 'Bitchslicer vs. the Police(with Cranial Records)'(곡명 자체가 Clash도 아닌 친구들이 이게 뭐란 말인가) 같은 곡에서 보여 주는 인더스트리얼 모양새나 의외스러울 정도로 멜로딕한 'Night of the Demons'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앨범은 매우 가벼운 분위기로 진행되는데, Willie Nelson의 'Mommas' 의 매우 유쾌한 커버는 거의 애교에 가깝다. World Eater 레코드의 발매작답게 조악한 음질이지만, 앨범 자체가 좋은 음질이 어울릴 음악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니 문제되지 않는다. 

앨범의 이야기는 대충 '오늘날의 재미없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Green Skull(앨범 커버의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엉뚱하게 튀어 버리는 스토리 덕분에 이를 따라가는 것은 큰 의미는 없을 듯하다. 빠른 비트감 사이에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Laaz Rockit, Exodus, D.R.I 등 밴드 풍의 리프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청자는 사실 상당히 정신이 없다.(듣다 보면 이 친구들, 스래쉬메틀 열심히도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물씬 풍긴다. 내놓고 흘러간 밴드들을 따라가는 모양새가 유쾌하다)Green Skull의 '녹색'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Earth A.D" 시절의 Misfits의 매우 유쾌하고 강력해진 변용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어쨌거나 이 밴드는 '그라인드' 밴드라고 해야 할 것 같고, 그런 만큼 Misfits의 차이는 꽤 큰 편이지만, 듣고 나서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Death Comes Ripping' 도 있지 않았는가. 이 글에 나온 밴드/뮤지션(Willie Nelson 제외) 중 하나라도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분명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