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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Metal

Sleeping Peonies - Rose Curl, Sea Swirl

[Khrysanthoney, 2010]

"Le Secret" 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Alcest는 그 당시에는 지금의 모습보다 더 블랙메틀적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밴드가 인기를 끌어서인지, 그런 식의 'dreamy black metal' 밴드들은 생각 이상으로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Alcest는 어쨌든(이런 식의 음악을 블랙메틀에 넣는다는 전제 하에) 블랙메틀 밴드였다고 한다면, 그 이후의 밴드들은 별로 자신의 정체성을 그런 식으로 규정짓고 싶어하지는 않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밴드와 앨범의 이름을 보고 블랙메틀 밴드라고 짐작하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봐도 4AD 같은 레이블에서 나오는 포스트록 밴드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이런 류의 밴드의 입장에서는 매우 솔직한 표현인 셈이다. 그리 비중이 크진 않을 블랙메틀 - 간혹 Jesu 같은 밴드를 연상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 식의 거친 사운드를 걷어낸다면 이런 밴드들은 슈게이징/포스트록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 매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 난 이런 스타일의 팬은 아직은 못 된다. 그리고 (안 그래도 'depressive' 한 음악이 인기를 끄는 와중에)Alcest를 따라 가는 밴드들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는지라, 커버부터도 영 마뜩찮은 이 밴드에게 크게 정이 갈 이유는 별로 없다. 다만 밴드의 첫 EP인 이 앨범은 예상 이상으로 거친 맛이 있다. 처음부터 보통의 블랙메틀 밴드들이 내세우는 '어두움' 같은 것은 밴드의 관심사가 아니라, 다만 멜랑콜리와 같은 테마의 표현 방식이 블랙메틀과 유사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말하자면 'blackened metal/postrock' 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다만 이 밴드는 - 아직 그리 인기 밴드가 아니어서 그렇겠지만 - 그러면서도 충분히 거친 음악을 하고 있다. 영국 출신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트레몰로를 긁어 대는 부분에서는(과장 좀 섞어서) 베이스가 좀 강하게 녹음된 Nigrescent를 생각나게 하는 면도 있다.

밴드의 주목할 점은, 이 밴드가 감정을 풀어 나가는 부분은 직접적으로 멜로디를 부각시키는 부분이라기보다는 블랙메틀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사실 밴드의 보컬은 전형적인 블랙메틀 풍의 스크리칭 보컬이다 - 클린 보컬을 전혀 쓰지 않는다. 베이스도 다운 튜닝된 묵직한 톤을 가지고 있다. 약간은 허풍스러울 정도로 강조된 스네어 드럼도 매우 빠른 템포를 가져가는 데 일조한다. 사실 Alcest류의 밴드의 느낌을 담당하는 것은 퍼즈 잔뜩 섞인 기타 연주에 있다. 그렇게 치면 밴드의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이 밴드의 강점은 블랙메틀에 있는 셈이다. 첫 곡인 'Lighthouse Alight, Star Aligned' 부터도 초반부를 지나면 템포가 빨라지면서 - 약간의 이펙트와 함께 - 블랙메틀 사운드로 돌아선다. 밴드가 직접적으로 서사를 제시하는 부분은 앨범에 그리 많지 않다. 밴드는 포스트록적 분위기와 블랙메틀, 그 외 생각보다 다양한 이펙트 및 앰비언스를 섞어내고 있으면서 굴곡 심한 구조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편이다. 물론 블랙메틀적인 부분이 중심이다.

그래서 앨범은 생각보다는 만족스럽다. 밴드는 raw black metal을 포스트록의 면모와 연결시키면서 사운드를 맞춰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런 기초에 있어서는 (Peste Noire가 먼저 생각나는)Alcest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Le Secret" 이 블랙메틀적이었다니, 그렇게 치면 이 밴드는 Alcest같은 밴드들이 과거에 걸었던 일종의 프로토타입으로서의 사운드를 재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나로서는 블랙메틀로서의 매력을 '아직은' 갖고 있는 이 스타일이 오늘날의 Alcest보다는 마음에 든다. 비교는 이상하지만, 트렌디해짐을 통해서 평범해진 펑크 앨범을 듣다가, Iggy Pop이나 Richard Hell의 니힐리스틱함을 경험하는 정도의 매력이 이들에게 있을 것이다. 외견상 느껴지는 것보다는 훨씬 에너제틱한 앨범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가치가 충분하다. 100장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