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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Translations

Hans Eisler - 음악과 파시즘

나치 독일 시대의 가장 유명한 저항 음악가 중 한 명이자, 가장 잘 알려진 사회주의 음악가 중 하나인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의 글. 아이슬러는 브레히트의 동료이기도 했고, 쉔베르크의 첫 제자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44년의 강연 노트 중에서 발췌.


전쟁 전에,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파시즘의 성공이나, 그들의 리더의 퍼스낼리티에 대한 자신들의 찬사를 표현하는 것을 듣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소위 전문가나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아마도 그들은, 파시즘이 진정으로 세계에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시대를 뒤덮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냈다.

성공은 항상 그와 같은 일정한 열광을 수반한다.

오늘날, 파시즘의 완전한 붕괴는 누구에게나 역사상 최고의 몰락으로 여겨지고 있다. 독일의 반파시스트들은 항상 파시즘은 어떤 새로운 생각도, 그런 생각을 찾아내려는 새로운 의도조차도 가져오지 못했다고 선언해 왔다 - 즉, 그것은 낙관적인, 그렇지만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야만적인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파시즘 이전보다 사람들에 대한 더 강력하고 효과적인 억압이 가능해졌다. 사회의 전면에서 모든 것을 빌려 오고, 훔치며, 그들의 전체주의적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효율적인 억압이 가능해진다.

우리 음악가들은 우리의 예술을 삶과, 그 위기들과는 별개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음악은 모든 사회적 흐름에 극단적일 정도로 민감한 것이다. 파시즘이 처음 독일 음악계에 발디뎠을 때, 독일의 음악가들은 이런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가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감정 교육(L'education sentimentale)" 을 쓰고 발표할 수 있었다면, 어째서 현대 독일 작곡가들은 히틀러 치하에서 실내악 음악을 계속해서 쓸 수 없었는가?

이유가 있다 : 나폴레옹 3세가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보다도 더 조직적이고 잔혹한 파시즘은, 그 인공적 조화에 대한 실로 약관의 불협화음 - 또는, 가장 추상적이고 현실과 무관한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의 약간의 반대의 숨결 - 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통제된다. 물리학, 수학, 심지어는 조경 예술이나 정물화도 잠재적으로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파시즘이 음악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파시즘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우선 첫째로는, 과거의 음악적 전통의 보전이다.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고전 음악의 훌륭한 연주가 계속되었다. 심지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중에게 좋은 음악을" 캠페인을 계속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다른 한편, 포크 음악 운동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가 있었다. 그들이 엔터테인먼트나 군가, 댄스, 오페레타 등에서 지배적인 것이었던 미국 재즈를 대체할 만한 매력을 찾고 싶었던 곳은 포크 음악이었다. 아마도 이런 문제들을 이해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당신 자신을 파시즘 체제에서 살아남으려 하는 음악가로 상상해 보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일 당신이 젊다면, 당신은 쉔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의 음악적 혁신들을 소화한 이후 자신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시작하기 전에, 파시즘이 당신을 멈춰세울 것이다. 이 현대의 세 대가들의 음악은 볼셰비즘적 문화(Kultur-Bolschewistisch)로서, 타락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의 작품은 금지되었고, 만일 당신이 그들을 따른다면, 당신 또한 위험한 위치에 있게 될 것이었다. 파시즘은 이 세 명의 대가들에 대해 무엇을 반대한 것인가? 그리고 왜 특히 이들 중에서도 쉔베르크였는가? 쉔베르크의 음악은 우리 시대의 복잡성과, 그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비행기가 발명되기 한참 전에, 공습 동안 대피소에서 경험하게 되는 공포를 표현했다. 나치에 의해 추구되는 모든 것들 - 제국주의적 목표에의 열광, 지도자에의 헌신, 삶의 방식에의 순응 - , 이 모든 것들이 쉔베르크의 작품에서 도전받는다. 쉔베르크가 표현하는, 그가 현대 사회에서 직면했던 외로움, 절망, 고통과 같은 것은 나치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2년에 괴벨스는 당국이 예술가들에게 내렸던 명령을 재확인하였다 :

"예술을 위한 예술도, 어떠한 개인의 주제의 선택도 있을 수 없다. 예술가는 독일 제국의 새로이 떠오르는 혼을 표현하여야 하고, 심리적 문제들을 회피하며, 나치의 군인의 형상, 노동자, 도시, 산업을 묘사하여야 한다."

그런 기준들에 따르면, 현대 음악은 파시즘의 적이 된다.

당신이 현대 음악을 작곡하고 있다면, 당신은 특정한 규칙들에 따라야 한다. 계속 진행해서 곡을 쓰라, 그러나 그 곡이 연주되고, 나치의 지지를 받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절충적 방식으로 곡을 쓰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서 몇몇 온건한 현대 음악가들 사이를 신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현대 독일 음악은 이러한 기초에서 나왔는가?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고 재능의 결여 때문도 아니다! 독일 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책임이 있는 현대 독일 작곡가들의 대부분은 침묵하거나, 그 지역의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로서 스스로의 지위를 뒷받침해 주는 곡을 쓰고 숨기는 것을 선호하였는가? 교사들이나 편곡자들 등은 어떠한가?

내가 1937년 프라하에 있었을 때, 나는 30년 전쟁에 기초한 자신이 쓴 새 오페라의 스코어를 내게 보여 주기 위해 여행자인 양 몰래 국경을 넘어 찾아 온 젊은 독일 작곡가의 방문을 받았다. 이 엄청난 재능의 작품은 극도로 진보된 스타일로 쓰여졌고, 그래서 그 주제의 혁명적 경향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그 음악 자체로서 '볼셰비즘적 문화' 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이는 나치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그 서곡을 단독으로 브뤼셀에서 연주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겁에 질렸다.

"게슈타포가 어떻게 예술 당국에 스코어를 제출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물어볼 겁니다. 그들은 가장 불쾌한 방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 음악가들에게도 말이죠."

그래서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 더 좋은 세상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다른 얘기를 해 보자 : Leibowitz라는 젊은 독일인 망명 작곡가는 독일의 파리 점령기 동안 프랑스 반군에 의해 은신되고 보호를 받았다. 감사의 표시로 그는 비밀리에 (다섯 명의 프랑스 음악가들과)쉔베르크의 가장 현대적인 작품들 중 하나인 목관 5중주 곡을 연주하였다.

프랑스 음악가들은 이에 매우 기뻐했다. 모든 프랑스인들은 독일 병사들의 큰 소리로 함께 부르는 포크 음악과 군가들에 질려 있었다. 쉔베르크의 음악은 최소한 어려운 시기의 인간의 감정과 고통을 표현하였다. 이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현대 음악의 또 다른 측면은 소위 실용 음악(Gebrauchsmusik)이라는 것이다 - 이는 오직 콘서트 홀을 위한 곡을 쓰는 데 만족하지 못했고, 실제의 삶에 더욱 다가간 음악을 원했던, 심지어는 음악이 구체적 목적에 기여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던 작곡자들의 모더니즘에서의 탈피의 한 모습이었다. 도나우에슁겐과 바덴바덴의 유명 페스티벌들에서, 우리는 연극, 필름, 라디오, 밴드 음악, 중창단, 학생들, 짧은 오페라 등을 통해 실험을 하였다. 이 분야에는 두 가지의 경향이 존재했다. 우익들은 그들의 작업을 순전히 기능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 어떠한 기능이든 충분했다. 포크 페스티벌에서의 치과의사들의 회합 같은 것이었다. 좌익은 음악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 이는 현실의 삶에 대한 음악의 더욱 긴밀한 관계였다. 이런 음악의 가치는 투쟁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 유용성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반동과, 파시즘에 대한 투쟁이었다.

이런 실용 음악의 좌익들은 히틀러에 의해 절멸되어야 할 구체적인 적들이었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단순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모든 목적에 대해 유동성을 지녔던 우익은 환영받았고 동화되었다. 그러나 10년 뒤, 이러한 실용 음악의 모든 사유들은 단순한 행진곡들, 소위 노동자들의 노래나 애국적 징글(jingle)과 같은 것으로 축소되었다. 인기 있는 작곡가도 나름의 어려움을 또한 가지고 있었다. 명백히 지난 20여 년 동안 독일의 인기 있는 작곡가 모두는 미국 재즈의 요소를 차용하여 왔다. 심지어 빈 오페라의 대부였던 Léhar도 어느 정도는 스윙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열등하고 타락한 인종의 산물로서 모든 재즈 음악을 금지한 나치 당국의 성명과 법령들은 어뮤즈먼트 시장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대안이 있었다. 당신은 가짜 민속 복장과 같은 것으로 재즈를 덧칠할 수 있었고, 히틀러가 프랑코의 절친한 친구였고 아르헨티나에도 친구가 있었던 것처럼, 라틴 리듬은 허용됐다. 얼마나 많은 폭스트롯(foxtrots)들이 탱고와 룸바로 위장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누구도 괴벨스에게 룸바의 기원이 아프리카였음을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양의 탈을 쓴 미국 재즈는 히틀러 체제에서도 살아남았다.

포크 뮤직에 대해서 말하자면, 약 150년 전 독일에서의 산업 혁명은 포크 음악을 끝장내 버렸다 - 그리고 히틀러 시대의 소위 그 부흥은 순전히 인위적인 것이었고, 조작된 것이며, 포크 음악의 진정한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는 현대 독일의 박물관에나 들어갈 법한 것들이었지, 새로운 음악적 삶의 형성의 기초는 아니었다.

음악 분야에서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만큼이나 완전히 패배했다. 아무리 성공적인 나치 작곡가라도 현대 독일 작곡가들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독일의 범죄와 부패의 시기에, 독일 음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젠 히틀러의 심포니도, 괴링의 오페라도, 괴벨스의 4중주도, Horst Wessel 풍의 시가도 없다. 돈과 권력이 이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제시되었지만, 좋은 음악과, 선량한 작곡가들은 파시즘의 진정한 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Hanns Eisler – Musik und Politik – Schriften 1924-1948, ed. Günter Mayer(1973: VEB Deutscher Verlag für Musik, Leipzig), pp. 489-493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