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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Translations

Punk Rock and Anti-Racism - or, Death in June Not Mysterious (2)

Punk Rock and Anti-Racism - or, Death in June Not Mysterious (1)
Punk Rock and Anti-Racism - or, Death in June Not Mysterious (3)
Punk Rock and Anti-Racism - or, Death in June Not Mysterious (4)

앞의 글에 이어서.



Doug Pearce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 바 있다 : "그렇지만, 내가 바랬던 것은 좌익들이 우리를 적이 아닌 그들의 편으로 보아 주는 것이었다. 보통 공연보다 그들과 관련된 공연에서 우리는 훨씬 소외되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신뢰하지 않았고, 페이도 받지 못했으며, 우리 이름을 실어 주지도 않았다! 일반적인 좌파들은 아주 기묘한 자들이고, 여전히 펑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게 별로 발전이 없는 이유일 것이다."[각주:1] 수 해 뒤, Crisis-ANL-RAR간의 연대에 대해 Tony Wakefor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 연대는 본질적으로 거의 이기적인 이들로 가득 차 있었던 정치 단체들이 우리를 이용했기 때문에 끝장나 버렸다. 오래 된 이야기이고 계속 하기에는 지겨운 얘기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엿먹었던 셈이다."[각주:2]

RAR과 같은 단체들과 Crisis 간의 관계에는 또한 두 가지 상호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 Pearce와 Wakeford는 트로츠키주의 그룹에 속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쓰는 가사는 그들이 아나키즘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종종 보여 주고 있다. 'Militant' 의 'I don't need your flag and I won’t kiss it, I don't need your law, you can stick it up your arse…' 나, 'Back In The USSR' 의 'Don't rebel you won’t get thanked, you'll just get run over by a tank, don't wanna buy the Morning Star, just be a boss in your big black car...', 'SPG' 의 'We hate all the coppers and they're just a bunch of Nazis, SPG, SPG....' 같은 가사가 그 예이다. 이러한 아나키즘적 경향은 Pearce가 밴드를 이끌어 온 방식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 밴드는 다른 멤버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레이블, 또는 매니저들과의 계약을 거부하고 계속 '인디펜던트' 로 남아 있었다. 80년대에, 아나키스트 밴드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청중들에게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대형 계약들에 응했던 데 반해 메이저 레이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Pearce와 Wakeford는 트로츠키주의에 찬사를 보냈지만, 그들은 사실상 프루동주의적인 아나키즘에 더 근접해 있었다.

당의 노선을 따를 수 없었던 Crisis는 그들의 많은 RAR과의 공연을 조직했던 SWP의 활동가들에게는 문제거리였지만, 그 문제는 Wakeford가 그들의 "동지" 가 아니었다면 쉽게 해결되었을 문제였다. 밴드와 그들의 친구들 - 파시스트들, 그 라이벌이었던 펑크 갱들, 심지어는 서로 싸웠던 - 의 무규율성과 결합된 비친화성이 긴장을 불러왔다. 이런 압박은 종종 밴드가 홀대받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그들은 페이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들의 참여에 감사를 받지도 못했다. 심지어는 밴드가 RAR의 공연에 참여했을 때, 그들이 약속했던 공연이 취소되었거나, 장비에 문제가 있었던 때도 있었다(덕분에 Doug Pearce가 감전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던 일도 있었다).

보통의 펑크 록, 특히 Crisis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Pearce와 Wakeford의 이후의 행보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는 개념은 "진정성" 에 대한 갈망이었다. Pearce와 Wakeford가 "성인" 으로서 했던 모든 것들의 동기는 정치가 아니라, 미학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댄디한 친구들이었음에도 트로츠키주의 그룹에 참여하도록 했던 것은 그러한 "진정성" 에 대한 갈망이었다. 특히 Pearce는 항상, 이 세상에서 다르게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처럼 행동해 - 상품 경제가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튀어나온 프리마돈나 마냥 - 왔고, 이런 미학적 태도에서 아나키즘은 명백한 것이었다. 미학적으로(그리고, 정치적으로) Crisis는, 이후의 Redskins에서 Blaggers ITA(그들의 볼셰비즘은, Pearce와 Crass가 프루동의 아나키즘에 더 가까웠던 반면, 바쿠닌주의의 소산이었다)에 이르는 "트로츠키주의" 밴드들보다는, Crass 같은 노이지한 아나키스트 밴드들에 훨씬 가까웠다. Crisis는 "진짜" 이기를 원했고, 정치를 궁극적인 미학적 입장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했다. 혁명의 형성이라는 현실보다는 개인적 진정성이라는 키메라를 좇으면서, Pearce와 Wakeford는 그들의 정치적 자세가 진실된 것이라 믿게 되었다. 이런 광적인, 그렇지만 기만적인, 정치적 과제에 대한 자기 확신은 Crisis가 그들의 팬들에게 스스로를 홍보했던 것에 기초하고 있었다(그 팬들 중 일부는 실제로, Pearce와 Wakeford가 그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들이 실제로 보여지는 모습 사이의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차이에 매료되기도 했다). Crisis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라 선언한 것을 주창하도록 이끌었던 그런 무능력함을 생각하면, 밴드의 주축 멤버들이 RAR과, 그리고 속류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한 것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좌익과, 그 인기 있는 지도부에 대한 그들이 환멸에도 불구하고, Pearce와 Wakeford가 Death in June(DIJ)이라는 새 밴드를 결성했을 때, 1981년 말엽의 Central London Polytechnic에서 있었던 그들의 첫 공연은 Workers Against Racism(혁명적 공산주의자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의 전위 집단이었던)을 위한 것이었다. 이 무대에서, DIJ가 사용한 군복과 파시즘적 심볼에 당혹스러워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안도하였다 : "우리가 처음 결성했을 때, 우리는 파시즘을 연구했고, 그에 깊은 의도는 없었다. 계속해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이 썩어빠진 이데올로기가 처음에 어떠한 말을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각주:3] DIJ가 WAR를 위해 연주하면서 그들의 반인종주의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은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보였다. 'Till The Living Flesh Is Burned' 같은 곡의 가사의 내용이 나치즘에 대한 건전치 못한 흥미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DIJ가 반파시스트 아젠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 보였다. 그러나, Doug Pearce가 80년대 중반부터 한 인터뷰들은, DIJ가 파시즘의 탈신비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지만, 그들이 그럼에도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해 주고 있다.

이는 Pearce가 1985년 Sounds 지에서 '긴 칼의 밤' 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 "우리의 흥미는 보통 얘기되는 것처럼 모든 반대자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숙청되고 SS에 의해 살해된 SA들이 가졌던 좌익적 요소들과의 동일시, 내지는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날은 인간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그들은 Hitler의 살해나 실각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래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과, 그들의 손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몇 시간 동안에 결정짓고 흘러가도록 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각주:4] Pearce가 정치와 역사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일반 상식까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갈색 셔츠는 국가사회주의 내에서의 "좌익" 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히 파시스트들이었다. 확장하거나 붕괴하는 것이 파시스트 운동의 본질이다. 만일 Hitler가 1934년에 나치 당의 지도자에서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계" 와 "인류" 에 작은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분개가 나치들을 권력으로 이끌고, 전쟁을 가져 온 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많은 지역에 수백 년 동안 스며 온 반유대주의 문화는 선동적 목적으로 나치에 의해 악용되었고, 국가사회주의적 리더십은 이런 인종주의를 끔찍한 결말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1. Misery and Purity: A History and Personal Interpretation of Death In June , Robert Forbes (Jara Press, Amersham 1995) page 212. [본문으로]
  2. Forbes ibid. 212. [본문으로]
  3. Forbes ibid. 36. 에서의 Doug Pearce의 말을 인용. [본문으로]
  4. Forbes ibid. 1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