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senal of the Left/Writings

무조, 내지는 범조적 서사

과연 어떻게 작곡하는가, 또는, 작곡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가, 그 곡 자체를 표현할 뿐인가? 식의 문제는, 세칭 고전 음악(즉, 클래식)과 대중 음악의 분류를 떠나서 - 물론 이런 이분법은, 문제가 심각하다 - 어디에서건 해묵은 것이면서 분명 쉬이 답할 수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적어도 내게는 확실히 그렇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 대상은 아름다움이 될 것인가? 추함이 표현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어떠한 곡에 있어서 서사를 요구함은 결국은 이러한 문제로 귀결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새로운('새롭다' 는 표현으로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시도였음에 분명한 쉔베르크 음악에 대한 Charles Rosen의 설명을 잠시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넓은 단성적 화성 구조에서는 어떠한 출구도 찾지 못하는 표현적 힘은 모든 상이한 악기들과 목소리들의 멜로디라인으로 스며든다. (......)따라서 쉔베르크의 기질과 잘 어울리며 또한 동시대의 다른 예술 분야의 운동들과 확실히 밀접하게 관련된 이 근본적 표현성은 그의 음악적 언어의 확대의 논리적 전개이기도 하다. 기법적으로, 그것은 화성적 긴장을 멜로디라인으로 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Charles Rosen, Schoenberg, Glasgow : Fontana/Collins, 1976, 54p)

적어도 이와 같은 '무조적 표현' 에 대한 Rosen의 평가가 옳다면, 결국 멜로디라인은 화성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즉, 12음계는 아름다움 외에, '추함' 의 표현을 통해 부조화의 요소를 개입시키는 경향을 밀고 나가 결과적으로 조성의 틀이 파괴되고, 선율과 화성의 체계를 없애 버리는 결과를 야기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것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쉔베르크가 자신의 음악을 범조음악pantonality music이라고 칭한 것을 생각하자. 즉 12음계는 으뜸음을 기준으로 한 선율과 화성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모든 음이 중심이 되는 범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각주:1]

그렇다면 일반적인, 무조 음악에는 멜로디가 없다는 비판에는 확실한 오류가 생기는 셈이다. 무조 음악의 수직적 화성이 수평적 멜로디로 치환되어, 무조적인 곡이 멜로디를 가지게 되는 경우를 실제로도 찾아볼 수 있다. (Schoenberg, 3 Klavier Stücke op. 11을 생각할 것) 자칫 그 멜로디가 지나치게 표현적인(또는, 직접적인) 경우는 결국 그 곡이 내부에서 갖는 다양한 화성적 가능성을 제약하게 되고, 결국은 다시 멜로디라인으로 전치되어야 할 화성적 긴장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클래식 음악 뿐만 아니라, 아마도 많은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의 원대한 시도(주로는, 컨셉트를 갖춘)가 비르투오시티의 포장 속에 서사를 상실하는 현상은 그렇다면 그 화성적 긴장의 복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는 구체적인 조성의 구현과는 무관할 수 있다. 그리고, 과연 근래의 진지함을 자처하는 어느 밴드가 조성의 파괴에서 자유로우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각주:2] 그렇다면 곡에 덕지덕지 발라진 갖은 장치들이나, 조성을 빠르게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테크닉들이란 그 긴장감의 도구가 되면서도, 자칫 긴장감을 파괴해버릴 수 있는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악보가 무지막지해야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 물론 이는 쉔베르크 이전에 바그너 등의 작곡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의, 소위 '트리스탄 코드' 를 생각할 것. [본문으로]
  2. K. Rosenkranz의 말과 같이, 숭고함이 몰형식적이라면 이는 더욱 타당할 것이다.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거나 추함의 요소가 개재되고, 이는 음악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