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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Writings

정치적 음악

최근에 우연히 모 블로그에서 본 글이었는데(물론 그 블로그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 스크랩해 온 글이었기 때문에, 원문이 누구의 글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다. 블랙메틀은 좌파적이랄까. 물론 이것은 '태생적으로 좌파' 라는 표현이었고, 직접적으로 음악의 정치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뒷부분에는 블랙메틀의 우파화라는 문구도 볼 수 있다. 독특한 이야기라면, '실험성, 내지는 기괴성' 을 좌파의 스탠스로 병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좌/우파라는 개념을 정치적인 맥락과는 구별해서 사용하는 느낌을 주는 감은 있었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꽤 의외스러운 접근이었는데, 이는 내부적인 스타일은 굳이 살펴 보지 않고, 헤비메틀이라는 좀 더 큰 범주에서 기존에 있어 왔던 평가와는 많이 틀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헤비메틀은 '혁신의 거부' 내지는 변화의 거부에 병치되어 온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이었다 싶다.

물론, 블랙메틀의 음악적 형식은 헤비메틀 내에서도 많이 구분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다른 스타일과 완전히 구별짓는 것은 지나칠 것이다. 위의 글에서는 장르 개념에 블랙메틀을 넣을 수 없다고 했는데(물론 내부적으로 부여한 정의는 있었다), 음악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장르가 아니라는 것은 개념의 지나친 해석이다. 장르는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사운드의 '분류' 의 개념이라고 한다면(장르 자체가 사운드에 선행한다고 생각하기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렵지 싶다), 이후에 나타날 사운드의 다양한 양상들을 단일 개념이 모두 포섭하지 못할 바에야, 그러한 다양성은 장르 개념과는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기존의 개념들을 폐기하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저런 음악 관련 글에서 신조어들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헤비메틀도 처음에는 '블루스의 통속화' 정도로 치부되던 신조어의 하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위 글에서 '좌파'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 단어가 주는 변혁의 이미지 자체만을 따 온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그리 정확한 용례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음악이 좌파적인가? 좌파적인 음악은 어떠한 것인가? 기존의 헤비메틀은 반혁신적이라는 시각은 아마도 지나치게 경직된 시각일 것이다. 이는 개인의 갈등 내지는 좌절의 사회적 분출 및 이를 통한 해결, 이를 위한 사운드의 구현이라는 '규범' 에 터잡고 있을진대(물론, 예술 자체가 혁명의 전위가 될 수 있는지는 좀 더 다른 논의다. 나는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규범의 당위성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을 결론일 것이다. 거기다, 이상의 장르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그 '장르' 에 포함되는 사운드의 다양성 또한 그 장르를 좌파적이라고 하지 못한다. 미디어의 시대에, 청중과 음악이 연결되면서 그 청중들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 그러한가? 그렇다면 서브컬쳐 하에서 벌어지는 공동체 의식은 좀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저런 퍼포먼스가 뮤직 비디오의 시뮬라크라가 되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판에(아마도, 양자의 태생은 그 반대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는 조금은 회의적이다.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을 제공하던 비르투오시티라던가, 많은 부분은 전자음악의 등장으로 희석되는 부분이 있다. 다른 부분도, 다른 이유로 그러할 것이다.



우리 Hawkwind 선생들이야 정치적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싫어할 양반들이지만,


이런 친구들을 정치적이라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둘 다 그런 특성이 장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참고로 이 사진은 리퀘스트에 의한 것/그런데 얘네 누구야)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음악 장르/형식에 좌파적, 또는 우파적, 내지는 다른 정치적인 특성을 부여해서 말한다는 것은 조금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한다면, 상품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예술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도 일어난다. Eugene Lunn은 "분업과 인간 활동 방식의 기계화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는 여러 예술 형식에 해롭다" 고 지적한다. 적어도 대중 음악의 '상품화' 는(이는 언더그라운드 음악 내지는 서브컬쳐에도 완전히 예외는 아닌데, 시장에서 그 음악들이 소량이라도 '판매' 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물신성을 그에 부여하면서 일반적인 '예술' 의 카테고리로서의 후광을 어느 정도 벗겨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 그래도 다양한 존재를 가진 수용자층은, 그 후광마저 느끼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창작자의 본래 의도를 어느 정도까지 보전하면서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Rolling Stones는 흡사 민중가요같이 불려졌던 'Street Fighting Man' 이 전혀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곡을 아님을 술회한 바도 있었다.

물론,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그럼에도 예술이 일반적인 상품과 마찬가지 지위로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 현상에 대한 찬가 식의 작품이라도, 현실의 구체적 현상을 꿰뚫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여가를 돌아보아도, 예술의 창작과 소비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그렇지만 그 '상대적 자율성' 이, 일반적인 상품 이상으로 음악, 내지는 예술 일반에 대해서 정치적, 내지는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로서는 더 정확한 표현을 당장 생각해 내지는 못했지만, 이 포스팅의 제목은 상당히 잘못 지어진 셈이다. 정치적인 음악, 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형상을 띠기에 더 적합한 양식의 음악, 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