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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Translations

How Black is Black Metal (2)

Kevin Coogan의 글. 두 번째 부분.

How Black is Black Metal (1)
How Black is Black Metal (3)
How Black is Black Metal (4)
How Black is Black Metal (5)
How Black is Black Metal (6)



LOC는 보통 다양한 음악 서브컬쳐의 소개인 양 받아들여져 왔고, 접근하기 어려운 언더그라운드 씬에 대해서 많은 가치 있는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을 진정 놀라운 것으로 하는 점은 그 저자인 Michael Moynihan이, LOC를 관통하고 있는, 정치와 미학적 폭력(aesthetic violence)이 결합되어 있는 상당히 명확한 사상적 본류(not-so-hidden sub current)를 지닌 극우적 입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책 자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파시스트의 입장은 아닌데, 이는 얼마간은 Moynihan이 현재는 플레이보이 지의 편집자로 있는, 노르웨이 유명 잡지의
음악 평론가로 활동한 Didrik Soderlind와 책을 공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Feral House의 편집자인 Adam Parfrey는 확실히 정치적 논쟁에 대한 것보다는 블랙 메틀의 신비한 세계에 대해 다룬 인기 있는 책을 출판하고 싶어했다. Moynihan 스스로도 파시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쉽게 잘 맞는 사람도 아니다. LOC는 표면적으로는 순전히 익스트림 뮤직 서브컬쳐에 대한 분석에 대해 다루고 있는 텍스트의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저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The Abraxas Axis

Michael Moynihan은 재미있는 사람이다. 혹자는 사실은 그는 세 명의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 Michael Jenkins, Michael Moynihan Jenkins, Michael Jenkins Moynihan - 이는 그 이름들이 그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1989년 젊은 보스니아인이, 그가 Church of Satan에 연계된 "오컬트-파시즘적 씽크탱크" 로서 설명한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하는 Abraxas Foundtaion에 합류하게 되었다. Moynihan은 Abraxas Foundation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Axis Sanguinaries(Blood Axis)" 로서 설명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It is the key fluid of history...

피는 삶과 같이 보여질 수 있고, 동시에 죽음과 같이 보여질 수 있다.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 폭력은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는 강한 성적 내포를  가진다. 이는 역사의 열쇠가 되는 유동적인 존재(the key fluid of history)가 된다... 사람 또는 인종의 의지에 있어 연관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피의 유전적인 측면이다. 그것은 전면전에 동원되는, 정신과 피의 연계를 설명한다. 이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세계 역사의 차원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의 피의 중추적 본질을 반복하는 것이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Moynihan의 피에 대한 물신(fetish)은 피를 마시는 것(AIDS에 감염되지 않은 혈액)을 포함한다. 그는 또한 1987년 하버드 대학 맞은편에 있는, Cambridge Commons에 있는 말구유 장면의 그림(manger scene : 역주 - 예수가 태어나던 장면을 상상할 것)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에 화재 현장에 남겨진 방화범의 메모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당신이 믿는 신은 끝장났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불이 필요한가? 신은 죽었다!"

Abraxas Foundation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또 다른 피의 숭배자인 Boyd Rice에 의해 1984년에 결성되었다. 그 이름은 빛과 어둠, 선과 악의 힘 안에서 결합되어 있는 그노시스의 신(Gnostic diety)인 Abraxas에서 온 것이다. Rice는 그의 단체가 "오컬트, 파시즘, 소셜 다위니즘에 빠져든 새로운 인간들" 을 창조해내기를 바랐다. "자라나고 있고 그러한 정보를 바라는 아이들에 대한 대안은 아직은 요원하다."

Boyd Rice와 Moynihan은 인더스트리얼 뮤직 씬에서 나타난 이들이다. Rice는 그의 프로젝트 NON을 통해 자주제작의 "노이즈 음악이 담긴" 블랙 앨범을 1970년대 말에 발매했다. Moyinihan의 경우는 원맨 파워 일렉트로닉스 밴드인 Coup de Grace를 1984년에 결성했다. 1989년 여름 Rice는 그를, 마침 NON의 투어를 하고 있던 일본으로 초청했다. 같은 해 Moynihan은 자신의 프로젝트의 이름을 Blood Axis로 바꾸었다.

Throbbing Gristle

...그리고 당신들은 이런 류의 (전체주의적/파시스트적)이미지의 사용하는 위선적인 인간들을 알고 있고, 그들이 노래하는, 그리고 나를 항상 성가시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파시스트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규율적인 전술을 사용하고 여기에서는 그에 필연적인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런 밴드에 있는 이들은 이 믿을 수 없는 수준의 폭력을 사용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폭력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내가 본 블랙 메틀 씬의 사람들에 대해서 좋아하는 점은 그들이 위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당신은 Throbbing Gristle과 같은, 다른 많은 방식으로 진짜 폭력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다른 밴드들을 찾아볼 수 있고, 진짜 히피인 Genesis P-Orridge같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 Michael Moynihan

Moynihan과 Rice를, Hitler를 몹시 흥분시켰던 바 있는 문화적 파시즘의 기이하고 아방가르드한 형태로 이끌게 된 일련의 사건들은 1970년대 말엽 인더스트리얼 무브먼트에서, 특히 정액 배출 퍼포먼스로 유명한 영국 밴드 Throbbing Gristle에 의해 시작되었다. Boyd Rice와 Throbbing Gristle은 1978년 Rice의 첫 런던 공연에서 함께 연주했고, 이후 베를린에서도 다시 함께 한 바 있다. TG의 Industrial 레코드는 심지어 Boyd Rice의 LP를 발매하는 데도 동의한 바 있다. TG와 Rice는 저명한 Re/Search의 1983년 인더스트리얼 문화에 대한 이슈에 있어 찬사받은 바 있다.

TG의 가장 중요한 멤버인 Genesis P-Orridge(영국 중앙 우체국의 말장난)는, 1970년대 초 메일 아트 무브먼트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자신의 이름을 Neil Megson에서 Genesis P. 로 바꾸었다. 그는 또한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Cosey Ganni Tutti" 와 COUM Transmission이란 이름으로 극단적 형태의 행위예술을 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쇼는 채찍질, 자해, 자위 행위, 관장, 구토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COUM Transmission은 Genesis와 Cosey,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Sleazy"(COUM의 마지막 해에 합류했던 Peter Christopherson) 가 더 많은 청중과 만나기 위해 일렉트로닉스 마스터인 Chris Carter와 함께 TG를 결성하는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

Boyd Rice는 그와 Genesis가 1978년 처음 런던에서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

나는 NON 초창기의 콘서트에서 Genesis와 연주한 바 있고, 그는 초기 TG의 테입을 들려주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가 탐구하는 음악적 방향성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데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내가 그를 만날 때 나는 TG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고,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찰스 맨슨과 히틀러에 대하 관심이 많은 아티스트라는 것 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류의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말이다. Genesis는 여전히 스와스티카를 사용하고 자신의 청자에게 히틀러가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었는지를 말할 것이다. 그는 히틀러를 'Uncle Hitler' 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건 오래 전 일이다.

Genesis P-Orridge의 히틀러에 대한 흥미는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펑크족들은 종종 스와스티카를 사용하였고, Malcolm McLaren의 섹스 부띠끄는 S/M이나 페티쉬 상품 외에 나치 심볼을 판매하기도 했다. 단순한 충격 요법의 의미 외, 스와스티카는 장발과 자유 연애, 플라워 무브먼트의 시대였던 1960년대의 이상들을 의도적으로 조롱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영국의 스와스티카 사용자들이 인종주의적이었던 국민전선이 당시 역대 최고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완전히 간과했었던 것은 아니다. 국민전선은 1976년 여름 Leicester의 보궐 선거에서 18.5%를 획득하였고, 런던 동부의 Hackney 지역의 하원 의장 선거에서도 비슷한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미학적으로 경직된 입장을 취하였던 국민전선과 잉글랜드의 스킨헤드/훌리건 지지자들에게, 펑크는 너무 반애국적이었고 허무주의적이었으며, 단지 잉글랜드의 불경기의 한 징후에 다름 아니었다.

포스트펑크의 인더스트리얼로의 전환점에 있는 TG는 SS와 유사한 번개 모양의 패치로 장식된 옷을 입고, 'Zyklon B Zombie' 와 'Salon Kitty'(베를린에서의 SS 대상 매음굴에 붙여진 이름) 와 같은 곡을 불렀다. Fetish 레코드에서 나온 TG의 곡 'Discipline' 의 커버는 베를린에 있는 구 나치 선전국 앞에 서 있는 밴드의 모습을 담고 있다. TG는 Hackney에 있는 그들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Death Factory라고 불렀고, 그들의 Industrial 레코드의 로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미확인 그림이었다. 많은 펑크족들은 TG를 여성 혐오적인 'death art' 파시스트 집단이라 무시했다. 1978년 7월 6일 런던 공연에서는 급기야 TG와 Rock Against Racism - Slits와 Raincoats 등의 밴드들이 참여한 - 의 멤버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