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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Non-Metal

Grey Machine - Disconnected

[Hydra Head, 2009]

Napalm Death를 처음 들었던 게 1994년이나 95년이었을 것이다. 앨범은 "Scum" 이었고, 유감스럽게도 그 앨범은 아직도 내가 그리 즐기는 앨범은 아니다. (그라인드코어 팬 하기는 떡잎부터 글른 셈이다)두세 곡 정도를 제외하면 2분도 넘어가지 않는 짤막한 러닝타임에 쉬지 않고 달려가는 사운드는 그래도 꽤 충격적이었다. 그 때의 기타리스트가 Justin Broadrick과 Bill Steer였는데, Bill Steer야 이후 Carcass에서 갑자기 Firebird로 빠져나가는 행보는 꽤 잘 알려져 있다. 사실 Bill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활동을 했던 Justin이지만, 그래도 Jesu와 Godflesh에서의 활동을 제외한다면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들은 사실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Scum" 에서만 연주했고, Jesu의 큰 성공을 생각하면 Jesu의 기타리스트라고 소개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만, 이런 식으로 하면 Napalm Death의 결성 멤버 중에는 이 밴드 출신이라고 소개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이미 Jesu와 Godflesh가 그렇지만, Justin은 Napalm Death 이후에 그렇게 '제대로' 메틀 사운드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사실 밴드명인 Grey Machine 자체가 Van Der Graaf Generator의 "The Aeresol Grey Machine" 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하니, 태생부터 괴이한 스타일일 것은 예측되는 것이다. 세상에 Napalm Death 출신이 VDGG라니. 게다가 Justin과 함께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 Isis의 Aaron Turner이니, 이 콜라보는 그 시작부터 많은 기대를 받기도 했지만, Aaron이 얼마나 노이즈를 좋아했던지를 생각해 보면, 앨범이 참 피곤할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그리고 앨범을 듣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Justin이 진짜 오랫만에 드럼을 연주했다는 사실이다. Napalm Death 이후에 Justin은 Sweet Tooth 프로젝트 시절이 아니면 드럼을 연주한 적이 없었으니, 화제거리는 이미 충분하다.

그런데 이런 화제거리 외에, 이 앨범에 대해 말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앨범은 사실 듣기에 꽤나 피곤한 앨범이다(졸리다는 말이다). 초기의 Godflesh를 생각나게 하는 베이스 라인으로 시작되는 'Wolf at the Door' 가 그나마 좀 익숙하지만, 인더스트리얼에서 갈수록 노이즈로 나아가는 사운드는 사실 종잡기가 어렵다. 좋게 얘기하면 Ornette Coleman이 소시적에 했던 피곤한 사운드가 생각이 나는데, 이 정도의 헤비 사이키델리아는 진짜 오랫만이다. 격렬한 피드백의 이용과 샘플링, 두터운 텍스처의 노이즈가 그래도 'Sweatshop' 같은 곡에서 나름의 강렬함을 구현하지만, 간혹 나오는 빠른 비트도 미니멀한 사운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만큼, 앨범 전체의 분위기는 일관된다고 할 수 있다. Justin은 앨범 발매 당시의 인터뷰에서 Jesu에서 하고 있는 몽환적이고 멜로딕한 것과는 다른 사운드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멜로딕한 사운드를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다 보니, 개별 파트의 연주는 크게 의미가 없다. 기타 등도 많은 부분에서 리듬 파트의 역할을 한다. 신서사이저 연주와 샘플링이 불명확하게나마 있던 구조를 더욱 헝클어 놓는다.

덕분에 이 앨범은 당시 팬들의 반응도 그리 좋지 않았고, 평단으로부터는 융단폭격을 맞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뭐, 내 경우에는 이 둘의 콜라보가 당연히 '졸릴'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렇게까지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실 이들의 노이즈는 '헤비 사이키델리아' 라는 것 외에 유별난 데가 있다. Justin은 음악을 다양하게 듣는 사람일 것이다. 사실 이들의 노이즈는 근래의 그것보다는 80년대 초반 노 웨이브 내지는 포스트펑크의 느낌을 상당히 준다. 이 와중에서 처음에 Godflesh를 연상케 하던 인더스트리얼은 앨범의 중반부 정도가 되면 Throbbing Gristle이 된다. 'Untitled' 에서의 일렉트로 비트는 내놓고 트립합을 연상케 하는데, 그러고 보면 앨범은 Aaron과 Justin의 순수 공작물이라기보다는, 평소에 공유하고 있던 노이즈/일렉트로 사운드에 대한 그들 나름의 오마쥬일 것이다. 물론 그런 요소들을 굳이 찾으면서 듣기에는 이 앨범은 참 피곤한 앨범이지만, 그렇다고 (혹자의 말마따나)Justin이 청자를 다 재우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좀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난 이 앨범을 좋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