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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Metal

Aenaon - Phenomenon

[Bleak Art, 2009]

Aenaon은 그리스 5인조 밴드(지금은 4인조로 되었다고 한다)이다. 밴드 이름은 그리스어로 'eternal' 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한다. 그리스야 사실 Rotting Christ 이후 블랙메틀에서 낯선 나라는 아니지만, 이 밴드의 멤버들은 생소하다.(뭐 이런저런 밴드를 하다 왔다니 하는 얘기다) 사실 앨범 커버부터 모양새는 좀 괴이하니 그리 놀랄 것은 아니다. 저 읽기 힘든 밴드 로고는 노르웨이 블랙메틀의 컨벤션을 열심히 따라가려는 듯하지만, 아트워크는 사실 그런 모습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Vintersorg가 "Visions from the Spiral Generator" 에서 저런 것과 유사한 느낌의 아트워크를 쓴 것 같긴 한데, Vintersorg는 스웨덴 밴드이고, 사실 Aenaon과 비교될 '레베루' 도 아니니 적당히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음악은 나의 그런 첫인상에 많이 빗나가지 않는다. 이 밴드를 듣고 가장 먼저 생각나는 밴드는 아마도 Emperor일 것이다. 사실 이 밴드가 - 위에서 노르웨이를 운운했지만 - 블랙메틀의 정형을 그리 잘 따라가는 밴드는 아니다. 일단 Emperor가 생각난다고 하더라도, 이건 3집부터의 Emperor의 의미이다. 사실 블랙메틀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그 리프는 데스메틀의 모습에 가깝고, 그것도 많이 뒤틀려 있다. 메인 리프 사이사이에 상당한 비중으로 나오는 트레몰로가 블랙메틀의 정체성을 보여주고(특히나 'The Virus Code' 는 이들이 '올드' 스타일을 알고 있음의 증거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뒤틀린 스래쉬 리프가 곡을 다양한 모양새로 만든다. 꽤 프로그레시브하다는 의미이다. 밴드는 짧은 EP이지만 많은 시도를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첫 곡인 'Et in Arcadia Ego' 의 일렉트로닉 인트로가 그 한 예이다. 이 쯤 되면 꽤 많은 밴드가 생각나기 마련이다. Emperor는 물론이고(사실 보컬도 Ihsahn과 많이 닮아 있다) Dodheimsgard나 Thorns 같은 밴드들이 생각날 법하다.

그렇게 치면 이들은 프로그레시브하던 블랙메틀 밴드들의 컨벤션을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은 그보다는 좀 더 모던하고(반 음 정도 다운 튜닝된 듯한 기타 연주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지도), 사실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건 'Navel' 같은 곡에서 특히 돋보이는 멜로디라인일 것이다. Emperor가 "Prometheus..." 앨범에서 보여주던 기타 리프와 'dissonant' 하게 맞물리는 키보드 연주 같은 것을 무기로 삼았다면, 사실 이들은 그보다 조금 더 듣기 편한 축에 손한다. 정교하게 짜여진 리프들이 전통적인 음계의 문법을 의외로 잘 준수하면서 움직인다. 그래서 이런 형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정통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프로그레시브한 밴드들이 잘 쓰는 'twist' 를 잘 배치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뒤틀린 리프에 비해서 곡의 구조는 따라가기 쉬운 편이다. 개성이라면 개성인데, 요새 '잡탕으로 잘 섞어내는'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음악은 아마도 비슷한 스타일로 분류될 동료들에 비하면 더욱 '엔터테인먼트' 에 가깝다. 소위 'math metal' 적인 어프로치가 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요소가 예측할 수 없는 장소에 배치되는 일은 없다. 템포 체인지시에 느껴지는 꽤 강한 그루브는 곡을 약간은 댄서블하게 만드는 면도 있는데, 가사도 그렇게 보면 진지한 척 유머러스한 편이다. 그리스 밴드라서 그런지도 모르나, 이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리스 철학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변주해 놓은 이야기이다. (Solefald만 철학자 얘기를 블랙메틀에서 하는 게 아니다/그러고 보니, Solefald도 보기 드물게 유머러스한 밴드였다)밴드는 부클렛에서 데모크리토스나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투스의 경구들을 나열하면서 이를 괴이하게 뜯어붙여 인간의 심리를 주제로 한 듯한 이야기를 가져간다. 물론 기본적으로 칙칙한 내용이지만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된다, 식의 장광설을 늘어놓고, 그럴듯한 사운드로 청자를 설득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개성이 느껴지는 친구들이지만 어쨌든 난 이들을 Emperor의 아직은 클론 밴드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적어도 꽤 유머러스한 이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곡의 짧은 EP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보여준다. 이런 앨범들이 자주 그렇듯이 트랙 번호도 CD를 넣어 보면 20번이 훌쩍 넘어가는 것도 유머라고 생각해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