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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Non-Metal

Runhild Gammelsæter - Amplicon

[Utech, 2008]

Runhild Gammelsæter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Southern Lord 레이블의 이름을 제대로 알렸던 Thorr's Hammer를 기억한다면 그 여성보컬을 생각하면 되겠다. 당시에야 갑자기 겨우 17살이었던 이 여성이 갑자기 밴드를 탈퇴하는 통에, Stephen O'Malley가 무서웠다 어땠다는 등, 뜬소문이 상당히 돌았는데, 결국은 노르웨이 출신의 이 여성이 미국에서의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 귀국하면서 밴드가 끝나 버렸다는 게 결론이었다. 사실 Thorr's Hammer는 다른 멤버들이 어쨌건 Stephen O'Malley의 밴드임은 분명했고, 그럼에도 이 커리어 일천한 여성 보컬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도)목소리 때문이었다. (미안하긴 한데 사실 예쁘지는 않다) 일반적인 여성 보컬리스트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이고, O'Malley와 Greg Anderson이 만들어내는 드론 사운드에 얹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어지간한 남성 보컬에 맞먹는 그로울링은 물론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좀 더 넓은 음역대에, 그녀 특유의 묘한 '센스' 가 있었다.

그런데 보컬리스트이자 작사가이기도 했던 Runhild의 앨범 활동은, Thorr's Hammer에서의 인상적인 시작을 생각한다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 이 앨범이 나오던 2008년에 이미 그녀는 데뷔한 지 10년이 넘어간 인물이었는데, 물론 Khylst나 Sunn O)) 에서의 활동도 있었지만, 거의 단발성 프로젝트이거나 일회적인 참여이다 보니 그녀가 중심에 있었던 음악적 활동은 없었다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치면 2008년에 나온 이 솔로작이 유일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데(물론 이렇게 말해도 사실 그녀가 해 왔던 '단발성 참여' 들은 꽤 굵직굵직하다), 어쨌든 James Plotkin, Stephen O'Malley와 같은 노이즈/드론 마스터들과 일해 온 보컬리스트이다보니, 그러한 모습은 분명히 보인다. 그렇지만 확실히 Khylst의 "Chaos is My Name" 같은 앨범과 비교한다면 Runhild의 목소리가 확실히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앨범의 많은 부분을 Runhild만큼이나 드론 사운드와는 '차이가 있는' 앰비언스로 채우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할 것이다.

그렇다고 Runhild가 소위 '디바' 식으로 부르는 보컬리스트가 아님은 확실하다. 덕분에 이 앨범에서 곡의 진행에 대한 어떤 선을 그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데, 이 앨범의 중심에서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것은 계산된 연주라기보다는 자유롭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는 Runhild의 보컬이기 때문이다. 사실 매우 드라마틱하고 부르고 있지만 그녀가 구체적으로 부르는 가사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영어를 못해서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가 악기라는 데야 별로 이견이 없는 듯하나, 인간의 악기가 다른 악기의 사운드들을 압도하고 그 자체로서 음악 자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예라고 생각한다. 사실 Thorr's Hammer에서의 그 엄청난 목소리로 유명해진 Runhild지만(혹자는 Attila Csihar에 필적한다기도), 의외로 거의 팝에 나올 법한 멀쩡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양상은 결국은 일정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앨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아무래도 다시 Thorr's Hammer와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인데, 리버브 같은 것은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헤비니스로 공간감을 만들어내던 Thorr's Hammer와 방법은 틀리지만 결과는 의외로 유사한 지점이 있다.

그리고 어쨌든, 이 앨범의 중심에는 Runhild의 목소리가 있고 이를 둘러싼 앰비언스가 있지만, 그 앰비언스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안에 뭔가가 존재하고 있다. 아르모늄에 뮤직박스, 플룻까지 등장하는 의외의 편성에, 거의 Sonic Youth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노이즈에서 전형적인 형태의 블랙메틀까지 의외일 정도로 다른 분위기들이 조금씩 뒤틀려 등장한다. 앨범의 곡명들은 이 앨범이 어느 정도는 'Life' 라는 컨셉트를 의도하고 있고, 그 속에서의 다양한 면모들을 그리고 싶었는지의 짐작을 하도록 하는데, 뭐, 그런 짐작이 맞다면, Runhild의 이 앨범은 삶은 그렇게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동시에 그 속의 이런저런 모습들은 사실 매우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인생을 관조하는 것이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앨범에서 Runhild가 거의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요소들을 그래도 성공적으로 엮어내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리고 어쨌거나, 걸출한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도 십분 발휘하고 있으니 앨범은 분명한 가치가 있다.(특히나 'Collapse – Lifting the Veil') 적어도 이 정도는 확실할 것이다.

post script :
Runhild는 세포 생리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이 앨범도 물리학, 생물학, 화학에서 많은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진 찍으니 괜히 적응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