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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enal of the Left/Writings

헤비 메틀 팬들은 남성적인가

그런 사람들이 많다. 10년을 넘게 겪어 온 일이니 그리 이상할 건 없는데,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내가 헤비메틀 - 특히나 블랙메틀 - 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흠칫 놀라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식의 반응을 보이거나(하긴 '블랙메틀 듣게 생기셨어요' 라는 말이 처음 보자 마자 나온다면 문제가 심각하다), 나를 보기 전에 이런 얘기를 듣고 나온 사람이라면 대충 내 이미지를 '가죽 쫄바지에 철제 악세서리를 사랑하는 머리 긴 마초맨' 정도로 예상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물론 나쁠 건 없다. 사실 헤비메틀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마초적인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Manowar 같은 이들이 판치던 시절, 그런 사람들을, 메틀 팬이 아닌 입장에서 달리 받아들이기도 어렵지 않았겠나 싶다. 그렇다면 잠깐 생각해 보건대, 헤비 메틀은 남성적인 음악인가? 더 나아가서, 장르 자체에 젠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사실 근래의 음악은 메인스트림이건 아니건 - 물론 내 생각에 - 멜로디의 중요성 자체가 줄어드는 느낌이니(멀리 갈 것도 없다, 'Sexyback' 부터는 그렇지 않았는가 싶다) 아무래도 이전에 비해서는 불분명하지만, 개별 트랙에 대해서 상술한 젠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은 없을 것이다. 단순한 표현이지만, 노래방에 남녀가 갔다고 했을 때 - 그 남녀가 가진 음역대가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 남자가 부르는 곡과 여자가 부르는 곡은 아마도 틀릴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 남녀가 사회 일반에서 그 젠더에 부여하는 특성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우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럼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메틀 뮤지션' 인 Motley Crue의 'Home Sweet Home' 을 부르는 것과, '얼터너티브 뮤지션' 인 Nirvana의 'Rape Me' 를 부르는 경우 중, 무엇이 더 남성적인 경우인가? 또 다른 경우로, 남성 뮤지션인 Motley Crue가 부르는 'Home Sweet Home' 과, 멤버 전원 여성(!)인 블랙메틀 밴드 Astarte의 비교라면, 무엇이 더 남성적인 경우인가? (계속 Motley Crue 얘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듣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더 좋은 예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조금 더 밀고 나아가면 이렇게 바꿀 수 있겠지 싶다. 과연 Motley Crue를 듣는 가죽점퍼 '싸나이' 와, 빈티지한 차림에 얼터너티브를 들으며 우수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물론, 대부분 남성의 '우수어린 표정' 은, 내 주변의 경험에 따르면, 우수어린 게 아니라 그냥 잠을 못 자 피곤한 것이다) 약간은 병약한 인상의 사내는 전자는 남성적이며 후자는 여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단순히 음악에 따라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 바람직하지 못한 표현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 '메틀 돼지' 와 '브릿 게이' 가 본질적으로 틀린 친구들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건 음악적 취향과 성적 경향성이 무관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같은 성별의 사람들이라도 자신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이성상이 무엇일지는 틀릴 수 있다. 활달한 경우를 좋아할 수도 있고, 조용한 경우를 좋아할 수도 있으며, 외모는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 또한 경험적 진술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대상을 개인의 개별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이용할지는 개인의 선택에 놓여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Hegel의 말마따나, 사물은 절대적인 객관물이 아니라잖던가.


이 분들도 집에서 쉬실 때는 순정만화를 즐기실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확인해볼 수는 없다.


물론 Astarte 누님들도 남성적이다, 여성적이다, 어느 한 쪽으로 단정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누님 맞던가...)


그래서, 나는 어쨌든 헤비 메틀은 그래도 남성적인 방향성으로 볼 구석이 많다는 데에는 이견을 달 생각이 없지만, 이를 헤비 메틀을 듣는 사람들은 남성적이라고 연결짓는 데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사실 이 매우 당연해 보이는 문장 때문에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던 것이지만, 헤비 메틀 또한 '절대적 객관물' 일 수 없는 만큼, 그 받아들이는 데는 여러 차이가 있을 것이다. (텍스트는 계속 미끄러지니 뭐니 등의 내용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말이지만, Manowar가 땀냄새 풀풀 풍기기 때문에 남성적이라고 말한다면, 파워풀 댄스로 일관하며 초콜릿 복근을 과시하는, 오늘날의 '서구화' 된 우리의 시각에 이상에 가깝게 여겨지는 남성적 신체를 보유한 댄스 그룹들을 좋아하는 여성 팬들은 Manowar의 팬들 만큼이나 남성적인가. 아마 그 여성팬들부터가 이런 얘기에 노이로제를 일으킬 것이다.


post script :
1. 물론 여기서 남성성과 여성성은 가치 판단과 무관하게 사용되었다. 가치 판단이 들어갔다면 그건 내 실수이니 양해를.
2. 그래서 결론은, 난 헤비메틀을 좋아하지만 얌전하고 엘레강스한 취향을 지닌 다소곳한 사람이란 것이었다(쿨럭).
3. 그리고 유의할 점은, 나는 '남성적이건 뭐건 좋으면 망고땡' ,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