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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Non-Metal

Spectra Paris - Dead Models Society(Young Ladies Homicide Club)


[Trisol, 2007]

Spectra Paris라는 이름은 생소하다. 사실 저 앨범 제목이 뭔가 giallo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구해 본 앨범인데(멤버 전원이 여성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 안 샀겠지만), 구하고 난 뒤에 알고 난 사실이지만 이 밴드는 Kirlian Camera의 Elena Alice Fossi의 밴드이다. 그러고 보면 아무 정보 없이 잘 골라잡은 셈이다. 그런데 막상 이 앨범 커버와 내가 알고 있는 Kirlian Camera의 이미지는 도통 맞질 않는다. 굳이 Kirlian Camera가 아니라, 이 분의 다른 프로젝트인 Siderartica도 그렇다. 그리고 어쨌든, Kirlian Camera의 '팬' 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 밴드에 대해서 들어 본 바가 없었다(물론 내가 못 찾은 거겠지만). 그럼 이건 뭔가? 싶기도 하다.

앨범은 뭐, 그럴 만했다. 별로라는 얘기가 아니라, 앨범은 Kirlian Camera와는 물론이고, Siderartica와도 판이했다. Elena가 참여한 앨범 중에 이렇게 듣기 편한 앨범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인데, 보통 고쓰 록 웹진에서 이들을 다루는 듯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신스 팝 수준이다. Kirlian Camera에서의 Elena를 기억하고 있지만, 이 분이 이렇게 여성스럽게 노래하는 분이었던가 싶을 정도이다. (사실 하고 나오시는 모습과는 물론 괴리가 크지만)신스 팝이라고 했으니 대충 예상 가능할 부분이겠지만, 음악은 Elena가 했던 기존의 어떤 음악보다도 일렉트로닉하다. 굳이 말하자면 Kirlian Camera를 그래도 갖다 붙일 만한 건 중간중간 나오는 차가운 느낌의 비트 정도에, 'Glittering Bullet' 에서 나오는 예의 '사이렌' 같은 Elena의 보컬 정도이겠다. 그러고 보니 레이블이 Trisol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그러고 보면 저 앨범 타이틀은 거의 사기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다고 실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앨범은 아주 훌륭하다. 내가 Kirlian Camera를 듣는 이유 중에 Elena의 보컬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있는데, 뿌리가 있는지라 이들이 사운드를 풀어나가는 식은 Depeche Mode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주류는 (물론 그래도 Depeche Mode와 떼어 놓을 수는 없지만)요새의 EBM 물을 상당히 많이 먹은 신스 팝 밴드와 비슷할 것이다. 중요한 부분은 그 다음인데, 많지는 않지만 퇴폐적인 면모가 있었던 이탈로 디스코의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 디스코 밴드는 아니지만 이들이 Tears for Fears의 'Mad World' 를 커버하고 있다는 것은 80년대의 향기를 느끼는 게 괜한 일은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다. 'Falsos Suenos' 의 뒤에 깔리는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저렴하게 느껴지는)신스 튠도 매우 친숙하다. 'Lucky City Oversight' 는, 다른 곡들도 그렇지만, 어떻게 Kirlian Camera 출신 보컬리스트가 이런 음악을 할 수 있을까 싶도록 팝적이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뉴 로맨틱스를 간만에 듣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앨범을 마냥 촌스럽게 하지만은 않는 것은 비트일 것이라 생각한다. Elena 본인이 'futuristic rhythm' 이라고 자신감을 표했었는데, 사실 뭐가 미래지향적인 건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잘 모를 일이지만, 비트는 EBM 특유의 멋을 충분히 간직하고 있다. 멜로디가 강한 터라 비트가 귀에 들어온다는 생각은 사실 별로 못 해봤지만, 자칫 나른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긴장시켜 주는 것은 분명히 비트다. 'Falsos Suenos' 와 'Side Zero' 가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헤비 리프가 얹혀지면서 좀 더 리드미컬해진 점도 있지만, 뒤에 깔리는 명민한 비트는 적당한 'twist' 를 집어넣는다. 과장 좀 섞는다면 New Order에서 Bernard Sumner가 하던 역할을 신서사이저가 하면서 뒤에 중심을 비트가 확실히 잡고 있다는 느낌.(물론 그렇게 니힐리스틱하지는 않다) 

그래서, 앨범은 분명히 80년대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만(사실 뉴 로맨틱스에 디스코만이 아니다. 이탈리아풍 사운드트랙에, 어쨌든 '고쓰' 다운 분위기도 살짝) 요새의 언어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시절에 신스 팝을 연주하는 밴드들은, 물론 나름의 고충점과 명민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간혹은 자신들이 Depeche Mode가 80년대 하고 있던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덮어 버리려는 억지스러움을 보여주는 모습이 있음도, 아니라고는 못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아주 솔직한 편이다. 그리고, 뭐, 어쨌든 처음에 이 앨범을 샀던 의도와 하나 연결하자면, Elena 본인(이나 다른 멤버들이나)이 일단 이탈리아 출신인지라 특유의 악센트 덕분에, 'giallo랑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군' 식의 자의적인 만족감을 주기도 했다. 지금 꽤 감명받고 있는 중이다.

post script :
앨범은 두 가지의 버전이 있는데(discogs에는 세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하지만, 하나는 Irond에서 나온 버전이니 당연히 스킵), 쥬얼 케이스 버전이 훨씬 예쁘다.


 
좋다고 하니까 의외로 믿는 사람이 없어서 첨부. 'Side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