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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Non-Metal

De/Vision - Subkutan

[Dancing Ferret Discs, 2006]

그러고 보면 Depeche Mode는 참 여기저기서 많이 추앙받는 밴드인 듯한데(물론, 나도 좋아한다), 정작 그들의 스타일을 따라가는 밴드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사실 그 점이 밴드의 비범함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이들은 어느 정도는 '취향 내지는 장르의 사회학' 을 초월하는 입지를 갖춘 셈이다), 정작 신스 팝이라는 장르를 계속 이어 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독일은 역시 전자음악이라고, 그래도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이 장르가 생명력을 유지하는 곳은 그 근방인 듯하다. 그리고 De/Vision은 그 중에서도 인상적일 정도로 오랜 커리어를 이어 가고 있는 경우라는 점에서 일단 눈에 띄는 경우이다. 하긴 이제 이들을 Depeche Mode의 후예 식으로만 소개하는 것(맞기는 할 텐데)은 조금 민망할 수도 있겠다. 이들의 커리어도 이제 20년은 되었단 말이다. 그리고, 유럽 일렉트로닉에서는 그리 드문 경우는 아니지만, 이들(또는 이들과 같이 활동하는 이들)이 은근히 보여 주는 '고딕' 적 면모는 Depeche Mode의 그것과는 어느 정도 구별되는 편이다. 흘러간 '뉴 웨이브' 가 고딕/고쓰 록의 맥락에서 얘기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밴드(2인조이니, 듀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긴 하겠지만)가 이런 입지가 되면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음악하는 이로서 딜레마에 봉착함은 분명하다. 기존의 팬들을 아우를 것인가, 새로운 이들을 포용할 것인가? 어찌 보면 이들의 경우에는 이는 더욱 심각한 고민거리일진대, 적어도 대중 음악 산업에서의 상품성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는 폐기된 장르일 것이기 때문이다. (메틀처럼 공고한 매니아층을 가지고 있는지는, 나로서는 잘은 모른다) 밴드의 보통의 모습보다는 좀 더 에너제틱한 면모의 'Subtronic' 은 그 고민의 일환으로 보인다. 거의 클럽 댄스 풍의 비트와 보코더의 광범위한 사용은 이들을 알고 있던 경우라면 조금은 당혹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Steffen은 분명히 "We gonna rock you" 라고 외친다)'Obey Your Heart' 나 'E-Shock' 같은 곡은 더욱 두드러진다. 보컬은 몇몇 부분에서는 거의 레이브에 가까운 면모까지 보여주는데(물론 이 부분은 보코더를 자제한다), 혹자의 말에 따르면 Depeche Mode가 Nine Inch Nails를 만난 것과 같은 모양새이다. (덧붙인다면, 'E-Shock' 는 그 정도도 넘어선다. 거의 Prodigy의 가장 강력하던 시절의 수준이다/그런데 말하고 보니, Kraftwerk 같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De/Vision은 멋진 멜로디라인을 만들 줄 아는 친구들이고, 미드템포의 곡들에서 그 재능은 잘 나타나는 편이다. 팝적인 앰비언트인 'No Tomorrow' 나, 인상적인 피아노 연주가 돋보이는 'My Worst Enemy' 가 특히 그러한데, 그러나 정점은 역시 전작인 "6 Feet Underground" 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In Dir' 이다. 크라이베이비를 사용한 기타 연주를 적당한 라운지 튠과 엮어내는 모양새는 물론 전작과 비교되지만, 밴드의 기존 스타일과 가장 유사하다는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밴드가 기타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Monosex" 부터이지만, 어느 정도 신서사이저에 함몰되는(주 선율은 항상 신서사이저의 몫임은 분명하지만) 모양새가 있었다면, 이 곡의 기타는 좀 더 적극적이다. 그러고 보면 이전 스타일을 유지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그 애티튜드는 좀 더 공격적인 셈이다. 크라이베이비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내 생각에는)이들에게는 공격적인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건 성공적인가? 유감스럽게도, 앨범은 어느 정도는 비틀거린다. 밴드의 멜로디라인은 명확한 존재감을 보이지만, 이들이 새로이 끼워놓은 요소들은 사실 사족으로 보인다. 더 공격적으로 말한다면 여러 종류의 일렉트로닉스 및 록 음악을 한번에 엮어내는 시도는 아직은 완전히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이전 앨범에서 밴드가 사랑과 희망을 노래했다면, 이 앨범에서는 그와는 상반되는 분위기가 묻어난다는 것도 변신의 시도일 수 있겠지만,(앞에서 '고딕' 적이라고는 했지만, 이들은 고딕적인 테마로 노래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앞에서 얘기한 '클럽 댄스' 류의 시도와 이런 분위기는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다. 앨범은 신스 팝이라는 조금은 지나간 스타일을 다루고는 있지만, 그 스타일이 살아남아 어떻게 변화하려 하는 모양새는 분명히 보여준다. 다만, 그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 또한 이들의 모습에서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럼에도 긍정적인 면은, 이들의 주무기가 원래 멜로디라인이었다면, 그 무기 하나만큼은 여전히 날이 제대로 서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덕에 노련미를 보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노련할 부분에서는 정말 노련한 셈이다. 'My Worst Enemy' 의 피아노는, 아마 작년에 들었던 멜로디 중에서는 가장 인상적일 것이다.

post script : 유감스럽지만 저 커버는 그리 맘에 들지 않는다. 다른 그림이었으면 더 나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