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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Pollution/Non-Metal

Culver/Seppuku - Dedicated to Soledad Miranda

[At War with False Noise, 2009]

자, 앨범 제목이 저 쯤 되어 주면, 암만 뮤지션의 이름이 생소할지언정 제목을 먼저 따져 주는 것이 좋겠다. 대체 Soledad Miranda가 누구인가? 여기부터 잠깐 영화 이야기.

유럽 Exploitation 영화를 얘기하자면 아마도(음악 팬들에게는 통상 Goblin이 음악을 맡았던 "Buio Omega" 로 알려진) Joe D'Amato와 Jesus Franco 감독을 짚고 넘어갈진대, Franco 감독의 페르소나였던 여성 배우 중 하나가 바로 이 Soledad Miranda이다.(물론 그래도 이 변태 감독의 가장 유명한 페르소나는 Lina Romay이겠지만) 아마도 "Vampyros Lesbos" 와 "Eugenie de Sade", "She Killed in Ecstasy" 가 가장 유명한 작품일 것인데(젠장, 왜 다 아는 영화지...), 사실 모두 시종일관 배우들이 옷 입을 생각을 안 하는 유치찬란 작품들이지만, 언제 Franco 감독이 성별 불문하고 배우들 옷을 입히면서 찍었던가... 생각하면 별 무리 없다. 이 Soledad Miranda는 몇 안 되는 영화에 출연 뒤 교통사고로 27세에 요절한지라, 아직까지도 추모하는 컬트 팬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워낙에 헐벗고 출연하신 일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그리 크게 평가받는 편은 아닌 것 같다. (앨범 커버의 오른쪽이 Soledad Miranda이다) 어쨌거나 그녀에게 헌정된 앨범이란다. 재미있는 것은 앨범 제목이 그럼에도 커버에 적혀 있지가 않다는 것? 물론 속지에는 그녀의 사진들로 꾸며져 있으니 그 의도를 알아채기는 충분하다.

Culver와 Seppuku 모두 이 앨범이 첫 cd 릴리즈이고, Seppuku는 이 앨범을 내고 해체했다고 하니 나름 이 밴드들을 접하는 데는 이 만한 앨범은 딱히 없을 것이다. Culver는, 레이블의 말로는, 영국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실험적인" 뮤지션인 Lee Stokoe의 솔로 프로젝트라는데, 사실 이 앨범만 들어서는 그리 나쁘지는 않으나 딱히 과소평가할 만큼 잘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밴드는 이 앨범에 31분짜리 노이즈-드론 트랙인 'Traces of the Woman by the Lake' 만을 싣고 있는데, 도입부의 그리 빠르지 않은 괴이한 효과음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긴 하나... 나름 두터운 베이스 라인을 기초로 곡을 끌고 나가는 편. 사실 이 정도 연주면 거의 기타를 쓰기는 한 건가 의심스러운 정도인데, 드론 사운드가 기초가 되는 곡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될지도. 곡의 후반부는 약간은 톤을 변화시키면서 초반의 메인 테마(라는 게 있는가 싶지만)로 돌아가는 듯한 모습으로 마무리짓는데, 전체적으로 매우 미니멀하고, 의도적인 것이겠지만 앰프 노이즈를 증폭시킨 듯한 사운드가 그리 듣기 녹녹한 것은 아니다. 과장 좀 섞으면 루즈해지면서 노이즈가 더 괴팍하게 섞인 Sutcliff Jugend 스타일이나, 그보다는 좀 덜 세련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Seppuku는 글래스고 출신의 밴드라는데, 역시 레이블의 말에 따르면 '파괴적인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이들이라 하나, 밴드의 리더 자체가 이 레이블의 사장이니 별로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밴드가 수록한 2곡이 상당히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인데, 'Inga' 가 좀 더 과격해진 슬럿지 둠 스타일에 초기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생각나게 하는 미니멀한 키보드 루프를 곁들인 식이라면, 'Emanuelle' 은 인더스트리얼/노이즈의 경향을 더 강하게 보여주는 곡이다. 최소한 'Inga' 의 경우는, 근래 들어 본 파워 일렉트로닉스 중에서는 가장 헤비한 류이기에, 확실히 인상적이다. 메틀릭한 요소가 많아서인지, 드럼이 좀 더 강하게 녹음되어 있는데, 내가 선호하는 강한 퍼커션음은 없지만, 대신 심벌이 꽤나 인상적으로 들려오는지라, 앨범에서는 가장 듣기 편한 곡일 것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레이블 사장은 Culver 같은 이들을 계약할 것이 아니라 자기 음악이나 열심히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무지하게 잘 한다는 의미는 물론 전혀 아니다)

말 그대로, 매니아층에 기반한 소규모 레이블에서만 만들 수 있는 독특한 앨범이라고 생각된다. 대충 보다 보면, 레이블/밴드 본인들도 이 음악이 Soledad Miranda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고, 사실 어떠한 서사를 경험할 수 있는 음악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만 특유의 괴팍한 분위기가 앨범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은데, 이 레이블 홈페이지를 가 보면 알겠지만, 2006년부터 앨범을 상당히 많이 발매해 왔는데, 사실 정상적인 앨범은 거의 없다시피하니, 아마도 이 앨범도 그런 식의 의도라고 생각된다.(그래도, White Heterosexuals 같은 거는 내가 봐도 좀 심하다) 거의 로컬 수준의 노이즈/일렉트로닉스를 다루는 듯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로컬 수준치고는 괜찮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상당히 난삽한데, 정돈된 노이즈를 기대하는 거는 어찌 생각하면 더 이상할 것이니,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Inga' 하나는 그래도 좀 더 친화적인 트랙이니, 이 레이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재미는 있다. 500장 한정.

post script :
1. Jesus Franco 감독은 180편 가량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는데, 내가 본 것 중 재미있는 영화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위에 적힌 것들도 그러하다. 말 그대로 Soledad Miranda만이 빛나는 영화.
2. 레이블은 Culver의 음악을 Conrad Schnitzler와 비슷하다는 식으로 광고하고 있는데, 내 귀엔 그건 거짓말.
3. 커버는 "Eugenie de Sade" 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