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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mony of the Creators

Interview with Gitane Demone(Crystelles, ex-Christian Death)



언제나 조악한 번역이 문제다. Christian Death의 보컬이었던 Gitane의 2009년 인터뷰.

[taken from Judas Kiss magazine]

Judas Kiss(이하 JK) : 오늘 당신의 웹사이트를 돌아보다가 당신의 작품들에 대한 웹 페이지를 보았고, 당신이 그린 그림들의 이미지가 올라와 있어 반가웠다. 몇몇 작품들의 화려한 디테일이 맘에 들었다. 그림을 그린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요새 주로 하는 것이 그림 그리기인가?

Gitane Demone(이하 GD) : 칭찬해 줘서 고맙다. 99년부터 정기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2006-7년 즈음까지 약 200편의 그림을 그려 팔거나 거래를 했던 것 같다. 2004년 동안은 내 그림들의 판매에 의지해서 살았다. Kevin Graves가 가장 많은 그림을 사 주었다. 내가 일일이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로 앞으로도 많은 거래가 있었으면 한다. 나의 마지막 작품은 2008년에 내 전 애인이 없애 버렸고, 요새는 다시 나무에다 기름으로 작업을 하는 중이다. 잉크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음악 공연도 예전처럼 많아지고 있고, 그래야 한다. 그리고 그것과, 펑크록 디스트로/레이블/샵/스크린 인쇄소에서의 파트타임 일거리도 갖고 있다. 시간은 많지 않지만 나는 그림 그리기나, 다른 작품들을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창조성을 진심으로 갈구하고 있다.

JK : 인상적이다. Popmeii 99이전에,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비주얼 아트 쪽에서 수학하거나 경험을 쌓은 적이 있었나? 아니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게 된 것인가? 전시회를 한 적은 있나?

GD: 공부한 적은 없다. 3살 때부터 그리기나, 짧은 이야기들을 써 왔다.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었다. 노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LA에서 몇몇 소규모 전시회를 했었다. 대단하진 않았다.

JK : 최근의 유럽 투어에서 보지 못해 아쉬웠다. 당신과 Kenton Holmes가 같이 연주하는 걸 보고 싶었다(나는 Akubi Object의 열광적인 팬이다). 반응은 어땠고, 하이라이트는 언제였나? 내가 맞다면, Crystelles 시절의 곡도 연주했는데, 미국에서의 반응과는 차이가 있었나? 당신이 성공적으로 이용했던 많은 스타일 가운데에서의 자연스러운 진보로서 Crystells를 평가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다. 내가 당신이 좀 더 강력한 록 음악 가운데 정말 괜찮은 퍼포먼스를 하던 것으로 본 1998년의 Kato, Berlin 콘서트를 생각한다면 그렇다. 몇 년 뒤에 당신은 Crystelles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데모는 정말 기대되는 내용이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GD : 두 멋진 아이들의 어머니가 된 것을 뺀다면 이번 유럽 투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런 경험이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났고, 누구도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호기심에 파 있었다. 누가 이런 시대에, 사회 부적응자 싱어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놀라웠다! 멋진, 끝내주는 청중들이었다 - 우리는 매일 밤 정해진 셋리스트 없이 1 1/2에서 2 1/2 정도의 셋리스트를 임의로 연주했다. Crystells 시절의 것을 포함한 개인적인 리스트다. 내가 X Death, Demonix, 내 솔로 작업들, Dream Home Heartache에서 불렀던 곡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밴드도 모르게, 나는 곡들 사이에, 카바레 스타일의 아카펠라를 만들었다. 하이라이트는 우리가 아카펠라를 연주하는 동안 청중들이 꽉 찬 조용한 공연장에서였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때 서로 잡담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신다. 핀 떨어뜨리는 소리마저 들릴 만한 방에서 내 목소리를 들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비엔나, 베를린, 파리, 이탈리아, 독일에서의 공연들... 모두가 멋지고, 최고의 청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꿈처럼 말이다. Crystelles의 곡들에 대해 말하자면 - 내가 현재 기타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외에는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것이라 여러 번 얘기했는데 - Crystelles는 아주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믿었고. 그건 내 정열과 같다 - 나는 인생 동안 이런 사운드를 찾아 왔다! Crystelles는 미국에서 더 많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당장은 말이다. 매주 다양한 청중들을 공연에 초대하여 연주를 하고 있다. 주로 예술 쪽의 친구들이다. 펑크나 개러지 씬에서. 매번 우리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사람들은 우리의 퍼포먼스에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다. 당신 얘기도 듣고 싶은데, 그게 더 좋을 것 같다. Crystelles의 첫 LP는 지금 공장에서 찍고 있다 - 내 예전 앨범들과 미공개 앨범들, 앞으로의 작업들, Crystelles의 "Attach and Detach" LP를 발매할 조그만 레이블인 'Free Bondage Records' 를 만드는 중이다. 우리 LP를 판매해 주는 Chris와 Kevin Graves, Terrie Thom, Michael Graves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레이블과 계약해야 했을 거고, 우리는 우리 음악을 직접 발매할 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을 테니까.

JK : 내가 보기에 아티스트들에게 요새 셀프 릴리즈는 흔한 일이다. 지나친 표현이나 사운드의 타협을 요구하는 레코드사들에게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Free Bondage를 이전의 앨범들을 재발매하는 데 이용할 예정인가? 우리가 기대할 것은 뭐가 있는가?

GD : 우리의 예전 앨범들을 CD로 모두 재발매할 만큼 재정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소량이라도 예전 작품들을 찍어낼 예정이다. 아마 새로운 아트워크로, CDR이 될 것이다. 20년동안 음악/예술 작품 발매를 위한, 메일 오더 스타일의 소규모 레이블을 갖는 것이 꿈이었다. 이제 인터넷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나는 아직 예전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많이 서두를 순 없다. 그렇지만 그게 앞으로의 계획이다.

JK : Christian Death 탈퇴 이후 솔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게 된 건 무엇 때문인가?

GD : 음... 나는 Christian Death를 떠나기 한 달 전 이미 솔로 공연을 했었다. 내가 89년 6월에 네덜란드로 갔을 때, Nijmegen's Festival of Perversity에서 실험적인 셋리스트로 했던 기억이 난다(Merzbow가 헤드라이너였다). 네덜란드에서 Festival of Death에도 참여하려고 했는데, 인생이 좀 복잡하게 돌아갔다. 그래서 곡들을 쓰고, 녹음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페티쉬 씬과도 약간은 관련이 있다. 몇 년 동안 비정기적이고, 거의 비계획적이었던 공연들에 대해 얘기했었다. 다양한 뮤지션들과 함께 실험했던. 내 그룹은 91년이나 92년께에 현실화되었고, 머지 않아 투어를 돌았다("Lullabies for a Troubled World" 가 먼저 완성됐지만, "A Heavenly Melancholy" 싱글이 91년에 나왔다). 일단 93년에 투어를 계속 돌면서부터는, 모든 게 꽤 잘 돌아갔다.

JK : 밴드의 멤버에서 솔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기분은 어떠한가?

GD : 그 생각을 계속 해 왔다. 다양한 친구들과 함께, 내가 주도해서 하는 나의 밴드 말이다. 나는 이것 저것 다 하는 타입이고, 종종 뮤지션들은 멋진 연주를 하는 외에는 다른 데 관심이 없다. 나는 내가 만들어 내려 하는 형식의 음악에 모든 이들이 만족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리더 역할을 잘 할지도 좀 의문이다.

JK : 새 DVD "Life After Death" 의 부클렛에서 많은 협연들이 제안되었다고 얘기했다. 6 Comm의 Patrick Legas와 작업하려 했었다는 게 특히 관심이 갔다. Demonix 시절의 당신의 음악과 6 Comm 사이에는 어떠한 유사점도 발견하지 못했다. 재미있는 협연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의 얘기는 없었나?

GD : 그 이상의 얘기는 없었다. 90년대에 Mother Destruction을 보러 간 일이 있었다. Amodali(아니면 Karen), Patrick의 처와 내가 함께 독일 잡지와 인터뷰를 했고, 거기서 같이 작업할 것을 다시 제안받았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꽤나 틀렸다. 자연은 나에게 항상 영감과 정신의 주요 근원이었고, 나의 페이거니즘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었다. Amodali는 정말 현명한 여성이었고, 그에 깊은 존중을 보낸다. Patrick은 그 만남 동안에는 Mother Destruction에서의 퍼커셔니스트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JK : 당신의 커리어 동안의 작품들을 들어 보면서, 나는 "오, Gitane의 사운드 같은데.." 식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Deathrock 매거진을 읽으면서 당신에 대한 멋진 글을 보고 나서였는데, 거기서 얼마나 많은 초기 'deathrock' 밴드들과 아티스트들이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언급하고 있었다. 당신과의 이러한 연계는 당신이 항상 여러 해에 걸쳐, 당신의 컨셉트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온 데 있는게 아닌가 한다.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는 누군인가?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당신의 음악은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다. 이 생각이 DVD의 데모 레코딩을 들으면서 처음에 머리를 스쳐갔다. 이 데모들에 대해 좀 더 말해 주겠는가?

GD : 몇몇 아티스트만이 영향을 준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나는 Jefferson Airplane, Jimi Hendrix, or the Rolling Stones, or The Beatles, or Doors, or Arthur Brown, Creedence Clearwater, James Brown, Yardbirds같은 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좀 더 "어두운" 밴드들은 음악 씬의 일부이다. 60년대의 나의 어린 시절 영향을 준 모타운 사운드처럼 말이다. 우리 가족과 AM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새롭고, 창조적인 음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의 요점은, 내가 여러 사운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 아마 내 작품들이 다양한 이유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의도치 않게 창조적이라면, 즉, 억지로 짜맞추려 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게 나온 것은 예술, 사운드, 글의 잠재의식적 "분위기" 에서라고 생각한다... 잠재의식이 밖으로 표출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거의 영향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때에 가장 영향받은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Jimi Hendrix, Pink Floyd, Billie Holiday. 이름을 원한다면,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은 이 셋이다. 예전을 돌아보면, 나는 나의 창조적 삶은 동물이 굴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것이어 왔다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음악이 내 머리로 들어왔고, 나는 내가 들은 것을 작업했다. 커버곡들에 대해서는, 내 생각에는, 가슴 저린 멜로디에 끌렸고, 그 당시의 사랑과 관련된 개인적인, 힘들고 비극적 경험들과 어우러진 몇몇 감성적 측면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이런 창조적인 삶은 꿈과 같은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깨고 싶지 않다. 지금도 84년의 그 당시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 내가 레코딩 과정의 기술적 측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잘 알고 있다는 정도를 빼면 말이다.



JK : 나는 당신의 초기 사운드가 재즈적 영향력에서 'rocking' 한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신의 모든 음악을 좋아하지만, 나는 좀 더 록적인, 당신이 Christian Death에서 했던 것 같은, 그런 배경에서 활동하는 당신을 볼 수 있었던 Stars of Trash를 매우 좋아한다. 내게 그 앨범은 당신이 록 음악의 컨텍스트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완전히 마스터한, 그 정점이라고 보여졌다. Dreadful Shadows와 작업했다고 알고 있는 그 앨범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얘기해 주겠는가? 그런 정점 이후 몇 년간의 휴식 뒤에 다시 돌아오게 되서 매우 반갑다. 어떻게 Stars of Trash의 음악에 이르게 되었는가?

GD : 98년에 앨범의 곡을 쓰기 시작했고, garage-y 록 밴드들과 연주를 했다... 녹음에 있어서 주안점은 좀 더 garage-y 다운 사운드를 얻는 것이었고, 그 곡을 좋아한다니 기쁘다. (세 곡은 96년에 이미 데모로 녹음되었던 것이다) Dreadful Shadows가 그들의 앨범 "The Cycle" 에서 배킹 보컬을 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내 목소리가 음악에 얼마나 잘 어울릴 수 있는지 확실히 확인하고 동의했고, 베를린으로 녹음을 하러 갔다. 아주 창조적인 과정이었고, Sven이 나의 다음 앨범을 그의 프로듀싱과 밴드로 녹음할 것을 제안해 왔다. 당시에, 내게 중요한 3명의 사람을 잃고 꽤나 운명론적으로 살아가던 와중에, 나는 먼저 떠나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송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작업에 착수했다. (베를린으로 녹음하러 갔고, 7개월 동안 있으면서 작업을 끝냈다). 록적인 곡들이었다. 록은 나의 근본적인 소스이다... 그 영향들을 많이 받았다. 창조적인 이라면, 도전하고 최소한 뮤즈가 이끄는 바대로 이끌리는 시도를 하기를 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Stars of Trash의 프로듀싱은 내가 원했던 거친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진정성 있는 사운드를 얻기 위해 내가 작업한 모든 이들(Dreadful Shadows의 멤버들)에게는 그런 거친 사운드는 조금 지나친 것이었다. 그래서 타협을 해야 했고, 앨범은 꽤 상업적인 사운드로 나왔다. 놀라웠다! 나는 곧 Warner Chappel의 "중역" 으로부터 계약을 제안받았다. 그래서 나는 독일과 미국에서의 프로모션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팝 디바였다 - 내가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말이다. 그 동안, 내가 독일의 Veilklang(지금은 파산한)의 서브레이블과 하려고 했던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어머니는 매우 편찮으셨고, 계약을 하지 못하고 돌아와서 미국에서 2년 동안 그녀를 보살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팝 디바도 아니고, 그렇게 되는 거에 관심도 없다. 돈은 영혼을 팔고, 뮤즈를 억압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업적 음악계와의 충돌에서 꽤 상처를 받았다... 상업적인 방식으로 계약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꽤 할 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내가 아티스트로서의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회사와 계약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 몇 년을 보냈는데, Crystells의 곡을 쓰기 위해 기타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는 법을 배웠다. Crystelles의 LP는 8월에 나올 것이다. 제목은 "Attach and Detach" 이고, 록적인 곡들로 가득하다.